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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파는 아버지의 오랜 고심끝에 정해진 혼담을 들었다. 쇠락해가는 가문의 딸은 유용한 곳이 딱 한 군데였다. 가문동맹. 결혼이 뭐 그렇게 대단한 건지 얼굴도 모르는 남의 집 아들한테 팔아넘기는 거 보면 어이가 없었다. 상대가 누구랬더라. 옆 동네에서 잘 나가는 상인 가문이라고 들었는데 흔한 레파토리였다. 몰락해가는 가문과 새로 뜨는 상인 가문은 서로에게 필요한 것을 충족시켜주는 파트너로 제격이었다. 한쪽은 귀족이라는 정통성을 가지고 있고 한쪽은 무시 못할 재력을 가지고 있으니 서로에게 얼마나 필요한 존재인지. 이 집에서 첫째 부인의 딸은 자신밖에 없어서 고민에 고민을 하던 아버지는 결국 상인 가문을 택했고 어제 그 통보를 들었다.
 
재미없고 단조롭다. 남들은 부러워 마지 않는 귀족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패파는 아무 것도 재밌는 게 없었다. 배다른 둘째, 셋째 여동생은 귀족 따님들이 배우는 예법이라던가 취미 활동들이 재밌는 것 같은데 자신은 아니었다. 어렸을 때부터 궁금한 게 많았고 몸쓰는 걸 좋아해서 무술을 배우고 싶어했는데 그건 아버지한테 들킨 순간 모든 날붙이를 뺏기는 것으로 마무리 되었다. 이것도 하지 말라, 저것도 하지 말라. 시도 때도 없이 하지 말라는 것만 많아서 입가가 퉁퉁 부은 채 보냈던 유년시절은 자신을 호위하던 기사 에드워드가 달래주는 이야기들로 채워졌었다. 세상에는 그렇게나 재밌는 이야기가 많은데 제가 하는 거라곤 고작 예절 수업이 다였지만.
 
그래서 패파는 하루 일과가 끝나고 하녀들이 물려졌을 때 쯤 올려다보는 밤하늘을 좋아했다. 에드에게 들었던 별자리 이야기를 떠올리며 있노라면 하늘을 수놓은 별들이 왜 거기 있는지, 어떻게 나고 자라는지 궁금해졌고 몰래몰래 얻은 천문학 책을 읽어보는 것도 행복했다. 해가 지고서야 얻을 수 있는 자유가 얼마나 행복한지. 넓은 밤 하늘 위에서 자유롭게 반짝이는 별들은 동경의 대상이면서도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나도 담을 넘어서 저 밖으로 뛰어나갈 수 있다면. 하다못해 집에서라도 마음껏 뛰어다닐 수 있으면 좋겠는데.
 
그러나 귀족 따님은 생각보다 할 수 있는 게 많이 없었다. 가진 것보다 자유롭지 않은 몸. 아니 가진 것 만큼 없어진 자유는 영혼을 갉아먹는 것처럼 옥죄어왔다. 오늘 자신을 보러 온다는 제 결혼 상대한테 귀족 영애가 할 것 같지 않은 행동을 하면 결혼이 파해질까. 그렇다한들 이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평소보다 더 화려해진 드레스를 입고 식어가는 찻잔을 내려다보았다. 빨리 밤이 됐으면 좋겠다. 아직 다 못 읽은 별자리 이야기가 아른 거린다. 침대 아래 숨겨둔 아주 작은 망원경ㅡ이라 부르지만 공연볼 때 쓰는 오페라용 글라스였다ㅡ을 빼서 반짝이는 별도 보고 싶었고 가슴이 탁 트이는 시원한 밤공기도 마시고 싶었다.
 
바깥으로 요란한 소리가 들렸다. 마차가 들어오는지 말발굽 소리가 울려퍼졌고 분주하게 움직이는 소리도 들렸다. 오면 무슨 말을 하지? 어차피 양쪽 다 원해서 결혼하는 것도 아닌데 뭐 이렇게 절차가 많은지 모르겠다. 부모님을 보면 적당히 따로 지내던데 차라리 빨리 결혼식을 올리고 각자 따로 사는 것도 나을지 모른다. 음 차라리 제게 정말 관심이 없는 쪽이 나을지도. 상인 가문은 원래 바빴고 아마 지금 온 저 사람도 그럴 확률이 높았다.
 
그렇게 생각이라도 해보자고 갑갑한 마음을 달래보던 패파는 달칵 열리는 문을 보았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하얀색의 머리카락이었다. 적당히 큰 키와 그냥저냥 차려입은 옷과 아무 생각이 안 드는 얼굴. 속이 좀 안 좋은 것 같기도 하고. 진짜 이렇게 아무 것도 모르는 상대와 결혼이란 걸 한다고 생각하니 속이 뒤틀리는 기분이다.
 
"안녕하세요."
 
패파는 일어나지도 않은 채 자신의 맞은편까지 걸어온 상대를 쳐다봤다. 네. 떨떠름한 얼굴로 아버지가 들으면 기겁할 만한 답을 내놓았지만 상대는 전혀 개의치 않는 모양이다.
 
"소개가 늦었습니다. 저는 호영이라고 합니다."
 
그래 이름은 들었다. 독특해서 기억하고 있는 이름. 감상은 그게 다였고 패파는 이 형식적인 자리를 어떻게 하면 빨리 끝낼 수 있는지 궁금했다. 이미 가문도 알고 이름도 아는데 이게 왜 필요한 건지. 마음에 안 든다고 결혼을 안 시킬 것도 아니면서 이런 귀찮은 짓을 해야하는지 모르겠다.
 
"오늘 뭐 특별하게 할 일이 있나요?"
 
그래서 패파는 귀찮다는 듯 물었다. 아뇨. 상대는 더할 나위 없이 만족스런 답을 돌려주었다.
 
"그럼 적당히 둘러보다 가세요. 어차피 그쪽도 원해서 온 건 아닐테니까."
 
말을 마치고 난 패파는 진짜로 일어서졌는데 상대는 눈만 꿈뻑일 뿐 별다른 말을 안 한다. 혹시 이러다 결혼 안 하겠다고 하는 건 아닐까. 그건 그거대로 나쁘지 않겠지만 아버지한텐 엄청 혼날지도 모르겠다. 싱숭생숭 삐뚤한 마음으로 상대를 쳐다보는데 자신에 맞춰 일어선 상대는 예상과 다른 말을 했다.
 
"결혼식은 예정대로 진행하면 될까요?"
 
무례하기 그지 없는 언행을 받아주는 건 에드가 전부인줄 알았더니, 아님 이쪽은 귀족 가문 타이틀이 가지고 싶어서 참는 건가. 패파는 일정이 언젠지 대충 들었던 것도 같아서 고개를 끄덕였다. 얘를 보니까 결혼을 해도 되겠단 생각이 들었다. 다름이 아니라 제 말에 토를 달 것 같지 않고 적당히 남처럼 살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제 부모님을 비추어봐도 결혼을 하고 나서 둘이 같이 보내는 시간은 거의 없었다. 각자 할 일을 했고 서로에게 별 다른 제지를 하지 않았다. 엄마가 자신만큼 유별난 짓을 안 해서 그럴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그랬다.
 
"알겠습니다."
 
제게 시선 한번 떼지 않는 상대를 쳐다본 패파는 괜한 말이 돌지 않게 한마디를 덧붙였다.
 
"몸이 안 좋아서 먼저 자리 좀 뜰게요."
 
상대가 믿든 안 믿든 그렇게 말했으니 됐겠지. 이제 더 이상 이 집에선 먹히지 않는 변명이지만 이쪽에선 당분간 먹힐 테니까. 그런 생각을 하며 망설임 없이 발을 떼었다. 오늘은 이 일과 때문에 다른 건 하나도 잡혀있지 않으니 방에 들어가서 천문학 책을 마저 읽으면 되겠다.
 
 
 
 
*
 
 
 
 
호영은 결혼식 준비로 한창 바쁜 것들을 처리했다. 귀족 영애인 패파는 어떨지 몰라도 귀족과 연줄을 잡은 자신의 집안은 이번 결혼식이 아주아주 중요했다. 그래서 본인 손을 거치지 않으면 안 되는 성미의 아버지를 보조할 게 많았다. 백작의 영지에 있는 집 중 가장 괜찮은 것을 골라 평생 거처로 삼을 곳을 꾸미는 것도 바빴고 혹시 백작님 취향에 맞지 않는 건 없는지 일일이 확인하는 것도 손이 많이 갔다.
 
그럼에도 호영은 바쁜 이 시간이 꽤 괜찮았다. 지난번에 가서 만난 따님을 보니 제가 생각하는 것보다 호락호락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그편이 더 나은 것 같았다. 어렸을 때부터 상단 일을 해보니 스타일이 확고할 수록 맞춰주는 게 편했기 때문이다. 제일 어려운 건 속내를 모르겠는 사람이었는데 그래도 영애님은 그런 건 아닌 것 같아 괜찮단 생각이 들었다.
 
내일 한번 더 만나기로 했는데 저번처럼 핑계 대고 도망가시려나. 그래도 내일은 같이 살 집에 마음에 드는 건 없는지 확인하러 가는 거라 자리를 뜨는 게 쉽진 않을 거다. 혹시 내가 마음에 안 드는 건가. 아무래도 살아온 배경이 다르다보니 마음에 안 드실 수는 있겠다. 아무리 한풀 꺾인 가문이라고 해도 귀족은 귀족이었고 그런 사람들과 어울려지내다보면 몸에 익은 예법이 전혀 다른 상인 가문은 마음에 안 드실 수도 있다. 머리를 긁적인 호영은 내일 어떻게든 해보자는 마음으로 다짐했다. 사람이라면 뭐라도 좋아하는 게 있을 테니까.
 
그러나 다음날 호영의 기대와는 사뭇 다른 일이 일어났다. 분명 정오까지 오겠다던 영애님은 마음에 안 드는 거 없으니 마음대로 하란 서신만 남겼다. 진짜로 만만치 않은 상대에 긴장이 된다. 이거 결혼식에도 안 나오시는 거 아닌지. 이쯤되니 그런 불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다행스럽게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여기가 앞으로 지낼 곳이라는 거지. 패파는 결혼식 당일에야 찾아온 앞으로의 집을 올려다보았다. 지겹고 따분한 결혼식은 제가 주인공이란 이유로 끝까지 자리를 지켜야했다. 오늘도 어김없이 웃거나 살가운 기색을 내지 않아 면박을 들었지만 그건 오늘부로 끝일 것이다. 쓸데없는 혼담 이야기에 휩쓸리지 않아도 되고 귀찮은 사교 모임에 억지로 나갈 필요도 없었다. 15살부터 지긋지긋하게 불려나간 모임을 3년만에 탈출하는 것이다. 앞으론 이 넓은 집 어딘가에서 적당히 제가 하고 싶은 일을 해도 되겠지. 집안을 돌봐야한다고 이야기하긴 했지만 그건 하인들이 다 알아서 할 일이었다.
 
3층 정도 되는 아담한 높이의 저택에 들어왔다. 좌우로 길어서 층이 많고 높았던 예전 집과 다른 느낌이 났다. 어디 한쪽 구석에 처박혀있으면 날 찾는 데 시간이 좀 걸리겠군. 그런 생각을 하며 정중앙에 놓인 커다란 계단을 보았다. 뭐 아는 게 있어야 어딜 갈 텐데 처음 온 저택에서 제 방이 어딘지, 어디에 뭐가 있는지 알 수가 없다.
 
"올라갈까요?"
 
패파는 계속 옆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불쑥 튀어나온 것 같은 호영에 미간을 찌푸렸다. 이제 좀 떨어져도 되지 않나 싶은데 이 낯선 공간에 서있으니 불쑥 드는 생각이 있었다. 혹시 여기서 어지간한 건 얘랑 같이 해야하나. 아니지. 그건 내 마음대로 정해도 되지 않나. 어차피 얘는 원하는 귀족 타이틀을 얻었으니 내가 뭘 해도 상관없겠지.
 
"내 방 어딘데."
 
그러나 패파의 기대와 달리 호영은 패파의 질문이 당황스러웠다. 결혼식을 방금 올리긴 했지만 부부가 되었으니 당연히 같은 방을 쓸 거라고 생각했다. 거기다 패파가 이 집을 둘러볼 때 오지 않아서 부부 침실을 만들어놓았는데 독방 같은 건 있을 리 없었다.
 
"....3층에 침실이 있습니다..."
 
하지만 같은 방을 쓰는데요. 차마 그렇게 덧붙이지 못한 호영은 일단 올라가자며 길을 안내했다. 3층 정중앙에서 좌측으로 꺾으면 거의 바로 문이 하나 나왔는데 3층 절반 가량을 차지하고 있는 이 공간이 바로 침실이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어지간한 평범한 집 구조가 다 들어가있는 부부의 공간이었다. 거침없이 문을 여는 패파를 따라 말도 못하고 들어간 호영은 생각보다 쉽게 침대에 도착했다.
 
"이제 됐으니까, ㅡ....."
 
패파는 침대를 보고 바로 호영을 보았다. 여기까지 데려다줬으면 됐다고 말을 하려는데 그제야 떠오르는 사실이 있었다. 어쩐지 3층이 너무 조용한 것 같기도 했다. 올라오는 내내 그렇게 많았던 하인을 보지도 못했고 매일 같이 옷 시중을 드는 하인도 하나 없다. 찌푸려지는 얼굴. 오소소 돋는 소름에 한기가 끼친다. 방금 전까지 아무 생각 없이 보던 호영이 괴물이라도 되는 것처럼 보여서 멈칫했다.
 
길어지는 침묵에 하하, 어색하게 웃은 호영이 머리를 긁적였다. 그것에 영애님, 아니 부인이 된 패파의 얼굴이 더 찌푸려졌다. 자신도 이렇게 잘 모르는 상태로 밤을 보낸다거나 할 생각은 없는데 부인께서는 제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싫으신가보다.
 
".....옷 벗는 것만 도와드릴까요?"
 
호영은 한껏 안심하시란 얼굴로 물었고 떨떠름하게 서있던 패파는 어정쩡하게 뒤를 돌았다. 틀어올려진 머리 덕분에 등 뒤에 달린 단추들은 금방 풀 수 있었다. 그 아래로 보이는 코르셋까지 헐렁하게 풀어준 호영은 영 불편한 것처럼 서있는 패파를 대신해 부지런히 움직였다. 원래 쓰셨다는 원단과 똑같은 원단의 이부자리를 정리했다. 그리고 다시 패파를 보는데 보석이며 꽃이 얽혀땋아져 있는 머리도 눕는데 불편할 것 같다.
 
"여기 잠시 앉으시겠어요?"
 
이번에도 한껏 안심하란 얼굴로 물었는데 패파는 호영이 침대가 아니라 소파를 가리켜서 일단 앉았다. 뭘 하려나 한껏 신경을 곤두세우며 방어적으로 팔짱을 꼈다. 맞은편에 앉으려나 긴장한 채 미간만 찌푸리고 있는데 예상치 못한 감촉이 머리에서 느껴졌다. 능숙하게 머리를 해주던 하녀와 달리 신중하게 손을 움직이니까 간지럽다. 그래도 그렇게 말을 하는 건 괜히 지는 기분이 들어 팔짱끼고 있던 팔만 꽉 잡아 누른 패파는 풀리는대로 흘러내리는 머리카락에 안심이 되었다.
 
"장식은 다 뺐습니다. 먼저 주무시고 계세요. 저는 남은 정리 좀 하고 올게요."
 
등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꼼짝도 안 하고 멈춰있던 패파는 제 머리에 붙어있던 각종 장식품들을 소파 앞 테이블 트레이에 올려두고 나가는 것까지 귀로 들었다. 하. 긴장이 되어 자신도 모르게 참고 있던 숨이 나왔다. 벌떡 몸을 일으킨 패파는 호영이 오기 전에 잠이 들거나 잠든 척이라도 해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호영이 풀어준 웨딩 드레스를 벗고 느슨해진 코르셋을 집어던졌다. 휘적휘적 걸어가 호영이 정리한 이불 안으로 몸을 뉘었다. 원래도 이만큼 큰 침대에서 혼자 잠들었는데 여기에 또 누울 생각을 하니 이렇게 좁게 느껴질 수가 없었다. 모로 누워 어깨를 바짝 웅크린 패파는 기분이 너무 이상해서 눈을 감지 못했다.
 
 
 
 
*
 
 
 
 
고요한 밤이 지났다. 간밤에 패파는 제가 누운지 한시간쯤 지난 후 들어온 호영이 멀찍이 떨어져 누워서 잠들 때까지도 자지 못했다. 거의 한숨도 자지 못한 채 아침을 맞이한 패파는 호영이 나가기 무섭게 일어나 주변을 살폈다. 오늘도 옷 시중 들어줄 사람은 안 들어오는건지 조용하기만 한 공간을 돌아다니니 옷장에서 입을 만한 옷을 발견하긴 했다. 사교 모임이 아니니 코르셋을 입을 필요도 없고 머리를 굳이 공들일 필요도 없었다. 옷을 입고 머리를 하나로 묶어내린 패파는 달칵 열리는 문소리에 뒤를 돌았다.
 
"일어나셨네요."
 
멀끔하게 차려입은 호영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식사는 어디서 하는 게 편하세요?"
 
연이어 돌아오는 물음에 이게 무슨 말인가 싶어 호영을 쳐다봤다. 식사를 어디서 하는 게 편하냐니. 당연히 식탁이 있는 곳이지. 패파는 새롭게 가문을 이어가는 젊은 부부가 정해야할 것이 많다는 걸 알 리 없었다. 귀족 가문들은 본인들의 정체성을 구현하기 위해 까다롭고 쓸데 없는 것들을 많이 만들었다. 일례로 패파는 모든 사람들이 한다고 생각했던 오후 3시 티타임은 어드벤처 가에서 대대로 내려온 정통같은 거였다. 늘상 입는 짙은 푸른색이 가문의 색인 것조차 선조들이 그렇게 하자고 정했기 때문이었다.
 
"장소를 몇 군데 정해두었는데 마음에 드시는 곳을 골라주시면 앞으로 아침 식사는 그쪽에서 하는 걸로 할게요.”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인 패파는 호영을 따라 걸었다. 기다란 복도를 걸어가며 느꼈는데 낮이 되면 햇빛이 쏟아져 내릴 만큼 창이 컸다. 밤에 별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단 생각을 하며 좀 더 적극적으로 이 집 구조를 알아야겠단 생각을 했다.
 
“여기가 방에서 제일 가까운 위치의 식당입니다.”
 
아침 해가 떠오르는 방향의 방은 제법 산뜻한 인상을 주었다. 밥 먹는 곳이 그렇게까지 중요하지 않은 패파는 더 돌아보고 싶지도 않았다. 여기로 해. 그렇게 말하며 차려진 식탁에 가 앉으니 눈을 꿈뻑이던 호영은 패파의 맞은편에 앉았다. 하인은 기다렸다는 듯 물을 따르고 식지 않게 덮어둔 덮개를 열었다.
 
백작 가문에서 먹던 대로 해달라고 해서 패파의 입맛에 안 맞진 않겠지만 그래도 혹시나 싶어 패파의 얼굴을 살핀 호영은 포크를 들었다. 오늘 이후 일과에 대해서 의논할 게 많은데 어떻게 운을 떼야 할까 기회를 봐야겠다. 집안의 규칙도 디테일한 것들은 다 여자가 관리한다고 하는데 거기다 백작 가문의 것들을 알 리 없는 호영은 패파에게 물어볼 게 많았다.
 
절반쯤 먹다 말고 입을 적신 호영이 패파를 쳐다보았다. 군더더기 없는 손놀림이 그렇게나 깔끔할 수가 없다. 백작 가문은 가문인가보다. 호영이 보기엔 흉내 내기도 어려운 단정한 움직임이라 방금 전까지 들고 있던 포크와 나이프를 다시 보게 된다. 혹시 제가 너무 경박스러운 건 아닌지 걱정된다. 고민해 봐도 물어볼 순 없겠지만.
 
“.........저.”
 
호영의 부름에 움직임이 멈췄다. 세상 관심 없는 얼굴로 쳐다봐 와서 그건 그거 나름대로 당황스럽다.
 
“.......이후에 확인해주실 게 많은데 괜찮으실까요?”
“...뭔데.”
 
그렇게 물으면 일일이 답하기도 애매한 것들이었다. 백작 가문에서는 어떻게 하루를 보내는지, 식사 후 특별히 하는 일과가 있는지, 집안 배치라던가 즐겨하는 활동이라던가 이 집에서 어떻게 살 건지를 물어봐야 했기 때문이다.
 
“....식사 후에 말씀드릴게요.”
 
이 대화를 시작으로 패파는 하루 종일 호영에게 붙들려 이것저것을 결정하게 되었다. 좀 적당히 알아서 하면 될걸 사소한 것, 그러니까 각 방의 용도도 아니고 테이블 모양부터 벽지 색깔에 찻잔 모양까지도 물어보는 호영 때문에 짜증이 날대로 난 패파는 3시의 티타임이 시작된 후엔 테이블을 뒤엎고 싶었다. 도무지 못 참겠다. 지금 몇번째 질문을 듣는 건지, 고작 이깟 티타임이 뭐라고 이 위에 올라올 포크 종류까지 물어볼 기세로 질문하는 호영에 화가 폭발하다 못해 부들부들 떨리는 것 같다. 
 
"야."
 
호영은 귀족 아가씨, 아니 부인 입에서 처음 들어보는 가벼운 표현에 물어보려던 입을 딱 다물었다. 어드벤처 가문의 티타임은 정말 중요한 전통이었고 이걸 물어보는 건 호영에겐 오늘 하루 일과 중 제일 중요한 과제였다. 귀찮아하는 건 진즉 알아챘지만 비위를 잘 맞춰서 최대한 고민 안 하게 여쭤봤는데 그것은 역부족이었나보다. 아니면 티타임에 뭔가 자꾸 물어보는 건 예의가 아니었나. 오늘 할 일 중 가장 중요한 걸 진행하는데 부인께선 완전히 화난 모양새여서 몹시 당황스럽고 긴장되었다. 옆에서 시중드는 하인들도 바짝 긴장한 채 두 사람의 대화가 어떻게 이어질지 숨을 죽였다.
 
패파는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눌렀다. 가뜩이나 남이랑 대화하는 게 귀찮은데 질문의 내용마저 안 들어올 만큼 자꾸 물어보는 호영에 진이 빠져서 미칠 것 같았다. 티타임이고 나발이고 조용한 곳에 누워서 쉬지 않으면 이 두통이 가시질 않겠다.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조용해진 공간에서 잡고 있던 잔을 내려두는 소리가 시퍼렇게 울려퍼졌다. 꿀꺽. 호영을 포함한 주변의 사람들이 긴장하거나 말았거나 현기증이라도 날 것 같은 패파는 몸을 일으켰다.
 
"ㅂ, 부인."
 
호영은 당황스럽기 그지 없었다. 그렇게나 중요한 전통이라고 들었는데 그런 티타임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는 패파에 당혹감이 차올랐다. 뭔가 자신이 엄청난 결례를 범했는지 당장 달려가서 사과라도 해야할 것 같았다. 성큼성큼 저만치 걸어가는 패파를 따라간 호영은 계단 끝에서 겨우 붙잡아 멈출 수 있었다.
 
"부인."
 
호영은 힘이 잔뜩 들어가 찌푸려진 눈에 침을 삼켰다. 잘못했습니다. 호영은 이유도 모르는 채 사과를 했고 패파는 이유도 모르는 채 하는 사과라는 걸 알아챘다. 뭐라 설명하기도 지쳐서 발을 떼니 따라오는 걸음도 짜증이 났다. 바로 앞에 있는 침실 입구 손잡이를 잡은 패파는 호영을 쳐다봤다.
 
"나가."
"....부인."
 
당황스러움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얼굴이었다. 결혼생활이 이렇게 짜증나는 거였다면 당장 어제로 돌아가 이 결혼에 깽판을 쳤을 텐데. 패파는 귀찮게 안 할 거란 기대로 택한ㅡ사실 제가 고른 것도 아니지만ㅡ상대가 이렇게나 귀찮을지 생각도 못 해봐서 후회가 막심했다.

"......"
"......"

됐다 무슨 말을 하냐 내가. 너무 짜증이 나서 머리가 핑 도는 기분이다. 말할 힘도 없어서 뒤를 돈 패파는 옷도 벗지 않고 침대 위로 누웠다. 꾸물꾸물 따라 들어온 호영이 보였지만 알게 뭔가 싶다. 어제 잠도 한숨을 못 자서 죽겠는데 열까지 받으니 온 몸이 아픈 것 같다.

뭔가 엄청 잘못했나보다. 호영은 이불에 들어간 후 곧바로 눈을 감은 패파가 한마디도 하지 않고 자려는 것처럼 보여서 그대로 멈췄다. 결혼도 처음이고 백작 가문의 생활을 접하는 것도 차음이었다. 어디서부터 잘못됐는지를 알아야 사과를 하든 바로 잡든 할텐데 아무 것도 모르겠다. 혼담이 오간 후부터 부지런히 배운 예법을 몸에 다 익힐 수도, 부인처럼 자연스럽게 하는 것도 불가능했다. 제가 할 줄 아는 거라곤 평범한 사람들처럼 대화하고 원하는 걸 구해다주는 것인데 그건 백작 부인에게 어울리는 게 아니었다.
 
소리없이 묵직한 숨을 내뱉은 호영은 티타임을 하다 뛰쳐나온 곳으로 돌아갈 자신도 없었다. 아니 그것보다도 부인의 마음을 풀어야할 것 같은데 등을 돌린 채 누워있는 부인은 뭐라고 말을 붙여야할지도 모르겠다. 제가 아는 거라곤 화가 났을 때 최대한 빨리 풀어야 된다는 거였다. 후. 숨을 한번 크게 들이마신 호영은 슬금슬금 패파가 누워있는 방향으로 발을 떼었다. 진짜 잘 생각인지 구김없이 감겨진 눈을 보니 입술이 안 떨어진다.
 
죄송하다고 할까. 뭔가 잘못한 게 있다면 죄송하다고 알려달라고 할까. 호영은 감이 안 잡히는 답을 찾으려 생각에 빠졌다가 깜빡이는 눈과 마주하게 되었다. 오묘한 침묵. 금방이라도 잠들 것처럼 깜빡이는 눈을 본 호영은 입을 열 수가 없었다. 거래하는 고객이 아니라 정말 가깝게 속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는 귀족 인맥이 있으면 좋겠다. 그런 생각과 함께 감긴 눈을 보았다. 정말 자려는 거라면 깨우는 것도 예의가 아닌 것 같아서 쳐다보는 것 외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



그렇게 엉망진창인 결혼생활의 첫날을 보낸 호영은 이후 이틀을 꼬박 속앓이를 했다. 누구한테 물어볼 수도 없는 걸 끙끙 앓고 있으니 저절로 소극적인 행동밖에 못했는데 그덕에 패파는 끝도 없이 자유로워졌다. 집안 시중들도 돌아가는 분위기를 보아하니 패파 눈에 거슬리면 안된다는 생각만 했는데 그덕에 패파는 원하는 만큼의 자유를 누렸다. 딱 하나만 빼고.

결혼하면 사교 생활이고 뭐고 다 때려치워도 되는 거 아니었나. 결혼한 여자들만 모인다는 사교 모임에 불려간 패파는 기운이 쭉 빠져서 돌아왔다. 가문의 굴레는 정말 영영 끝나지 않을 것만 같다. 정말 너무 재미없는 인생이다. 쟤는 이게 얼마나 불편한지도 모르고 여길 들어온거겠지. 그래 지금 남 걱정할 때가 아니었다. 남자 만나라고 판 깔아주는 어린 나이의 젊은 사교계와 겪을 거 다 겪고 자존심 싸움밖에 남지 않은 결혼 후의 사교계는 차원이 다른 피로도를 몰고왔다. 거기다 끽해야 열여덟밖에 안되는 패파에게 그만한 아들딸이 있는 귀족 부인들은 상대도 불가능했다. 자꾸 뭘 시키고 제 입맛대로 들들볶는데 차라리 호영의 지긋지긋한 질문들이 귀엽게 느껴질 정도였다.

입맛도 사라져서 3층까지 곧바로 올라온 패파는 하인이 옷을 벗거주는 대로 멍하게 서있었다. 인생이 원래 이런가. 그냥 죽은 사람이라고 치고 어딘가로 도망쳐서 살고 싶었다. 아니면 호영이 아버지처럼 첩이라도 두면 어디 먼 곳 가서 살아도 되지 않나 싶어질 지경이었다. 태어나서부터 봐온 게 이런 것밖에 없는 패파는 아무리 생각해봐도 괜찮은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몸을 갑갑하게 조이던 코르셋까지 벗고 가벼운 가운 하나만 걸친 패파는 시중도 물리고 소파에 앉아 몸을 늘어뜨렸다. 뭔가 탈출구가 필요했다. 뭐라도 좀 숨을 쉴만한 게 없으면 진짜로 도망치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나른하게 뜬 눈꺼풀이 뉘엇뉘엇 지는 붉은 햇살을 의미없이 담았다. 나만 이렇게 재미없나. 한껏 차려입고 고고한척 잘난척 그럴듯하게 말하고 행동하는 게 뭐가 그렇게 고귀한 혈통이라는 건지 알 수가 없다. 그렇게 꿈뻑꿈뻑 맥아리 없이 피상적인 고통을 곱씹고 있으니 언제 들어왔는지 소리도 못 들은 호영이 보였다. 왜 그런 감정이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패파는 홀린 것처럼 입을 떼었다.

"좋아?"

호영은 삼일 째 잠도 제대로 못 자고 속만 타들어가는 자신의 얼굴을 보며 물어보는 질문에 미간을 찌푸렸다. 생각한 것보다 더 최악인 영애였던가. 백작 가문의 첫째 부인이 낳은 유일한 딸임에도 불구하고 패파의 평판은 그리 좋지 못했다. 여느 여자들은, 아니 특히 귀족 영애들은 배운 예법 때문이라도 상대에게 매너있게 대한다는데 패파는 전혀 아니었다. 매너는커녕 시큰둥한 표정으로 무안하게 만들기만 한다고 혼담도 번번이 취소되었다는데 그게 거짓이 아니란 걸 몸소 증명하고 있다.

"뭐가요."

그래서 자신도 모르게 예의없는 답을 했지만 울컥 차오른 감정이 가시질 않았다.

"너 귀족됐잖아."

호영은 할 말을 잃었다. 아 그러니까 고마워 하라는 건가. 정말 이것보다 최악일수가 없다. 지난 며칠을 고민한 제 시간이 아까울 지경이었다. 어차피 자기 마음대로 할텐데 뭘 그렇게 전전긍긍했나. 정말 최악 중의 최악이었다.

"이제 내가 뭘 더 하면 돼? 애라도 낳아줘? 넌 어디 숨겨둔 여자라도 없어? 걔랑 낳고 나랑 낳은 니 자식이라 그래. 그렇다 해줄테니까."

한껏 짜증난 얼굴로 말하는데 호영은 자신이 눈앞에 있는 사람과 결혼했단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화가 차오르고 있었다. 자신을 뭘 얼마나 천하게 봤길래 저런 말을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뭐라고요? 부들부들 떨리는 걸 참으며 되물으니 독기 가득한 눈으로 쳐다보는 게 정말 소름돋고 화가 났다. 곱씹을수록 차오르는 분노에 숨을 몰아쉬는데 분명 직전까지도 표독스런 표정을 하고 있던 얼굴에서 눈물이 후두둑 떨어졌다.

"진짜 짜증나."

거칠게 눈가를 닦아낸 패파의 목소리였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 삶은 제제 일말의 행복이나 자유를 허용하지 않는 것 같았다. 단 하나도 제가 원해서 하는 게 없었다. 포크를 무슨 색으로 놓는지가 그렇게 중요한가? 내가 원하는 모양의 가구나 원하는 색의 벽지를 바를 수 있으면 그게 행복한 건가? 패파는 모든 걸 가졌다고 모두가 입 모아 말하는 이 삶에서 뭐가 진짜 가진건지 답을 낼 수가 없었다. 신나서 웃어본 기억이 언제였는지 기억도 안 났고 진심으로 대화를 해본 사람도 누가 있었는지 모르겠다. 너무 억울했다. 유일하게 거처를 옮길 수 있는 결혼에서조차도, 이 공간에서도 대화거리는 그게 다였다. 얼마나 귀족답게 꾸미며 살고 싶은지 티타임 컵 모양까지 물어보는 결혼 상대조차 지긋지긋했다. 진짜 빌어먹을 일이었다. 너무 화가 나고 서럽다. 가문이 뭐라고 일면식도 모르는 남자애랑 결혼한 것도 싫었고 그 상대도 관심있는 게 귀족의 삶밖에 없는 것도 짜증났다. 나이를 좀 더 먹고선 어린 시절 몇번이나 혼나면서도 부렸던 투정을 못 부렸는데 꼭 그때처럼 모든 걸 다 원망하고 싶었다.

호영은 화를 내는 건지 울음을 터뜨리는 건지 모를 패파가 부들부들 떠는 걸 볼 수밖에 없었다. 너무 당황스럽고 이유를 모르겠다. 귀족 돼서 좋냐고 물으면 화나야되는 사람은 내가 아닌가. 자신이 한 건 귀족 부인의 심기가 뭐때문에 상했는지 전전긍긍 고민한 것밖에 었는데 깔보는 것도, 화내는 것도, 무시하는 것도 다 부인이 해놓고 갑자기 운다니. 열이 받은 게 있어서 움직이지도 못하고 쳐다만 봤다. 끅끅거리며 분이 안 풀리듯 우는 얼굴은 한점의 편안함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러니까 도대체 왜 부인이 우는건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호영은 울면 울수록 힘이 부쳐 독기가 아닌 서러움만 남은 부인을 보며 화를 낼 수 없었다. 자신은 왜 이렇게 남의 감정에 금방 동화되는지 모르겠다. 상단에서 거래를 할 때도 넌 너무 물러서 탈이라고 말하던 아버지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그러나 호영은 울음을 그치질 못하는 상대를 앞에 두고 매정해질 수 있는 성격이 아니었다.

흐으, 흑. 서러움이 가득 담긴 울음을 보며 옆에 놓인 얇은 천조각 하나를 집어든 호영은 패파의 옆에 앉았다. 파들파들 떨리는 손에 천을 쥐어주고 이유 모를 울음소리를 듣고 있으니 그 울음의 사유가 그리 짧은 시간에 만들어진 게 아니란 것만은 알 수 있었다. 등이라도 토닥여드릴까 하는 생각이 아주 잠시 스쳤지만 그건 좀 아닌 것 같아서 손을 멈추었다. 딱히 멈출 기색이 없어보이는 울음소리를 듣고 있는 호영은 저절로 생각이 비워졌다.

 
 
그 다음날부터 호영은 아직도 묻지 못한 어드벤처 가의 유구한 티타임 예절 대신 부인 맞은편에 앉아 차를 마시며 패파를 관찰하는 걸 선택했다. 기다란 식탁보다 훨씬 작고 동그란 티테이블 덕분에 패파의 표정이며 행동이 훨씬 잘 보였다. 몸에 밴 예절로 그림처럼 우아하게 움직이는 손이 간결하게 잔을 들어 입으로 가져갔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관심이 가는 것은 지독하게 가라앉은 눈동자였다. 어떤 이는 버릇없다고 또 다른 이는 무안하게 만든다고 말했던 표정이 저런 표정이었을까. 그렇다면 아무래도 그 사람들은 부인을 자세히 들여다 본 적이 없는 것이다. 자신도 이제서야 보이는 얼굴이지만 한끝 차이로 달라진 인상은 당연하게도 신경이 쓰였다. 큼. 입안을 달큰한 꽃향으로 채운 호영이 헛기침을 했다. 창밖에서 제쪽으로 닿는 시선엔 생기가 없다.

"부인께서는 좋아하는 게 있으십니까?"

사람이라면 분명 좋아하는 게 있다. 아버지를 도와 상단 일을 하면서 다양한 사람을 만나본 호영은 그렇게나 서럽게 울던 부인도 당연히 좋아하는 게 있을 거라 생각했다. 대게 감정은 한 사람이 가지고 있는 폭이 동일해서 그렇게 서럽고 화날 게 있으면 그 반대만큼 좋아하고 기뻐하는 게 있는 법이다. 그래서 호영은 제 질문이 시답잖은 것처럼 시선을 돌리는 패파에도 개의치 않았다. 평소에 즐겨 하시는 일이 없으십니까? 자수라던가, 뭐... 그런 거요. 귀부인들이 할만한 일이 뭐가 있었더라 곱씹으며 물어봤는데 패파의 표정이 보기좋게 구겨졌다. 일단 자수는 안 좋아하시나보다. 
 
"혹시 좋아하는 거 있으면 제가 구해다드릴게요."
 
혹여 표정이 더 구겨질까 급하게 덧붙이는 말에 눈을 깜빡인 패파가 쳐다봐왔다. 꿀꺽. 부인이 필요하다고 하면 전역을 다 뒤져서라도 구해오겠지만 제가 잘 모르거나 엄청 귀한거면 어떡하나 하는 걱정이 이제서야 든다.
 
"책."
 
그러나 패파는 아주 간결한 답을 뱉었다. 생각해보니 결혼한 사람이 상인 가문인데 제가 원하는 걸 적당히 요구해도 되지 않나 싶었다. 거기다 제 가문 보고 결혼한 거니까 여튼 잘 보이려고 애를 쓸 텐데 왜 그걸 생각 못했을까. 패파는 호영의 앞에서 예상치 못한 울음을 터뜨린 뒤 자존심이 상해 자조적으로 무심하게 두었던 관계를 다시 가문의 입장으로 쳐다봤다. 그래 내가 운 건 운거고 백작 가문인 건 백작 가문인거지. 어쨌거나 이유는 몰라도 상대 역시 제 기분을 살피긴 하니까 좀 뻔뻔해져도 될 지 모른다. 조금 더 또렷하게 눈을 뜬 패파가 조건을 달았다.

"천문학 책 다섯권."

패파는 열권을 말하려다가 줄였다. 혹시 쟤도 귀족 영애가 학문을 궁금해하는 걸 이상하게 여기려나. 말을 뱉고 그런 생각이 들어 쳐다보는데 천문학이요? 하고 되물어왔다. 호영의 표정은 역시나 예상치 못한 걸 들은 얼굴이었다. 아이씨... 뭐라고 변명해야 할 지 모르겠다. 아님 못 구해다주는 거냐고 뻔뻔하게 나갈까.

"....그거면 됩니까?"


그러나 호영은 너무도 구하기 쉽다 못해 당장이라도 가져다줄 수 있는 품목에 의아했다. 엄청 값비싼 보석을 가져다달라 그러면 제 선에서 해결할 수 있는 게 아니고 아버지는 물론 상단 전체랑도 이야기를 해야할지 몰라 걱정했는데. 호영도 패파도 서로 다른 의미로 마음을 졸이던 대화는 아주 가뿐한 결과를 도출했다. 패파는 냉큼 고개를 끄덕였고 걱정을 덜은 호영은 다시 물었다.
 
"천문학책 어떤 걸로요?"
"..종류는 상관 없어. 천문학이면 돼."
 
패파의 답을 들은 호영은 부인의 수준에 맞지 않는 책을 가지고 올까봐 걱정이 되긴 했다. 한 열댓권 가져와서 골라보라고 하는 게 그나마 구색을 맞출 수 있는 방법이겠다. 그런데 천문학이라니 정말 의외긴 했다. 아 아니지. 혹시 어드벤처 가문은 대대적으로 천문학을 좋아하나? 부인 가문의 고유한 색상이 밤하늘만큼 짙은 파란색인 걸 떠올린 호영은 지금도 그 색의 원피스를 입고 있는 부인을 쳐다보았다. 그런 색 옷을 입고 있어서 그런가 아님 부인의 머리색도 푸른 빛을 띠고 있어서 그런가 밤하늘이랑 잘 어울리는 것도 같다. 직전보다 생기가 도는 눈동자도 별처럼 반짝이는 것 같은 부인을 보며 물었다.

"별을 좋아하십니까?"

긍정도 부정도 안 하는데 얼굴을 보아하니 맞는 모양이다. 그리고 번뜩이는 생각 하나. 호영은 예상 외의 수확을 얻은 티타임에 당장이라도 상단에 나가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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