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패파는 드디어 이 집에서 할 일을 찾았다. 상인 가문에서 태어나 스무살도 안된 호영은 귀족 영애들이 뭘 하면 되고 뭘 하면 안 되는지 거의 모르는 눈치였다. 몇번 간을 보다 내린 결론은 그랬다. 그래서 아무렇지 않은 척 제가 원하는 책들을 부탁했는데 호영은 제가 원하는 것보다 5배 정도의 양을 가지고 와서 골라보라고 했다. 그러면서 어디서 들었는지 이건 어떤 내용이고 어느 정도의 수준의 책인지 설명해줬다. 그럼 패파는 그 내용을 들으며 당장이라도 읽고 싶은 마음 대신 고민하는 척 다 들여다놨는데 그렇게 차곡차곡 3층 공간 한 구석에 쌓아가기 시작했다.
그덕분일까 패파는 호영과 결혼한 것에 대한 만족감이 생겼다. 일단 제가 원하는 걸 하는데 딱히 막지 않았다. 그게 상류층 문화를 몰라서인지 아님 호영이 별 생각 없어서 인지 몰라도 결과적으로 그렇게 됐다. 그렇다보니 침대 밑에 숨겨두고 겨우 꺼내봤던 책들을 해가 떠있을 때 읽는 것도 가능해졌다. 신혼 부부가 써서 함부로 들어오지 않는 3층 공간 중 책읽기 제일 좋은 책상을 골라 그 근처에 책을 쌓아뒀는데 그걸 본 호영은 그 책상과 잘 어울리는 디자인의 책장까지 가져다두었다. 그러면서 책장이 마음에 드냐 물어볼 땐 진짜로 숨통이 트이는 기분이 들어 몇번이나 책을 정리해봤다.
이 집에서 자신을 제외하고 제일 높은 위치에 있는 호영이 이 공간을 허락하다못해 만들어주다니. 이건 정말로 아무 제약 없이 마음껏 하고 싶은 걸 할 수 있단 소리였다. 그래서 태어나서 처음으로 한껏 들떠 책들을 이렇게도 둬보고 저렇게도 둬보는데 정말 행복했다. 책 옆으로 빈 양피지 더미들과 깃펜까지 올려두니 제가 원하던 서재랑 똑같아졌다.
오늘도 점심 식사를 마치고 별다른 사교 모임이나 방문 약속이 없어서 3층으로 올라온 패파는 광대가 한껏 올라가있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느껴보는 자유로움이었다. 성큼성큼 계단을 내딛는 발걸음이 아주 가벼웠다. 티타임까지 별다른 일 없이 책을 읽을 수 있다니 이렇게 행복할 수가 없다. 요즘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3층 안쪽 공간으로 온 패파는 어제 읽은 그대로 펼쳐져있는 책 앞에 앉았다. 이 집은 해뜨는 곳을 바라보고 있는데다 창이 넓어서 해지기 전까진 햇빛이 쏟아졌는데 그덕분에 초를 따로 켤 필요도 없었다. 완벽하다. 패파는 길게 내려온 소매를 걷어올리며 책에 집중했다.
한편 호영은 요즘 집에 잘 못 붙어있었다. 귀족들은 하는 일이 없어서 그런가ㅡ전적으로 호영의 시점이었다ㅡ사교 모임이 많았는데 백작 가문의 사위가 된 호영은 이곳저곳에 불려다녔다. 당연히 잘 알 수 없는 문화를 그럴싸하게 흉내내는 건 쉽지가 않았다. 잘 알지도 못하는 내용에 적당히 맞장구 치며 웃는 것도 돌아가는 정세를 파악하는 것도 체력 소모가 컸고 머리가 아팠다. 차라리 패파가 부탁한 것들을 구하러 돌아다니는 게 편안할 지경이었다. 책과 거리가 멀었던 터라 조언을 구할 만한 사람도 구해 두어서 더 그랬다.
귀족도 편하게 지내는 건 아니라고 생각이 들 때쯤 타고 있던 마차가 집에 도착했다. 이제 호영에게도 집이 제일 편해져가고 있는데 다름이 아니라 부인의 기분이 좋았기 때문이다. 천문학 책을 골라주는 책방지기에게 무슨 내용이냐고 물어보고 부인에게도 그대로 전달해주는데 그걸 외워가면서도 재미가 없었던 호영은 부인이 좋아하면 됐지, 란 생각으로 굳이 제 옆에 싣고 가져온 상자를 한번 더 확인했다.
점심 시간이 지났으니 오늘도 3층에 있으려나. 외투를 벗고 편한 옷으로 갈아입은 호영은 몇가지 확인 사항을 물어보는 시중에게 답해주며 발을 떼었다. 결혼한지 얼마 안 돼서 그런가 3층 공간은 하인들이 거의 들어오지 않았는데 살짝 열린 문으로 들어가며 문을 닫았다. 이리저리 둘러진 길을 따라 원래는 차 마시는 공간으로 마련해뒀던 곳까지 갔다. 아니나 다를까 책을 보며 앉아있는 패파는 제가 온 걸 모르는 눈치다.
소파 위에 상자를 올려두고 비스듬하니 등진 방향으로 멈춰섰다. 역시 백작 가문 따님은 다른가보다. 재밌는 게 책읽는 거라니 새삼 신기해서 쳐다보았다. 그러다 스륵 흘러내린 머리가 귀찮아서 귀 뒤로 넘기는데 호영은 왠지 모르게 훔쳐보는 기분이 들어 멈칫했다. 그리고 그 인기척에 고개를 돌린 패파와 눈이 딱 마주쳤다. 움찔. 죄 지은 것도 없는데 잘못한 것처럼 쭈뼛하게 있으니 더 수상해보였다. 서둘러 정신을 챙긴 호영은 소파 위에 올려둔 상자를 집어들었다.
"부인."
호영은 상자가 커서 패파 앞에 올려둘 자리를 찾지 못했다. 책과 양피지가 놓인 테이블은 꽤 큰 상자를 올려두긴 그래서 주변을 둘러보는데 마땅한 자리가 없었다.
"....뭔데?"
패파는 호영이 들고 있는 의문의 상자를 쳐다봤다.
"부인께서 좋아하실 것 같아 구해왔는데..."
호영의 눈이 분주하게 돌아다니는 걸 보던 패파는 다리를 올려두는 소파 앞의 작은 스툴을 가지고 왔다. 조금 놀란 얼굴이 된 호영은 패파와 눈이 마주치곤 입맛을 다셨다. 묵직한 상자를 올려두고 고맙단 이야기를 하며 상자를 열었다. 귀한 천으로 쌓인 물건을 본 패파는 분해되어있는 이게 뭔지 알아채며 눈이 커졌다.
"이거..."
패파의 휘둥그레진 눈을 보며 기분이 좋아진 호영은 냉큼 답했다.
"천체 망원경입니다."
패파는 거짓말 하나도 안 보태고 지금까지 느껴본 심장박동 중에 지금이 제일 빨리 뛴다고 생각했다. 책에서만 봤던 별을 보는 물건이 이 방에 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실내에서 오페라 보려고 만들어놓은 글라스는 매번 답답함을 느꼈는데 그것도 이 집에 오면서 어디에 있는지 몰랐다. 안 그래도 밤에 별을 올려다보는 건 뭐라고 말해야 그럴싸하게 할 수 있을까 싶었는데 아예 대놓고 밤하늘을 올려다보는 물건을 주다니. 그것도 오페라 글라스랑은 비교도 안 될 만큼 큰 천체 망원경을 말이다. 내가 좋아할 것 같아서 구해온 거니까 나 준다는 거겠지? 냉큼 손을 뻗은 패파는 분해된 것처럼 보이는 기다란 철제 원통을 건들여보았다. 커다란 렌즈도 있고 기다란 몸통을 보니 책에서 본 거랑 얼추 비슷해보였다.
한편 호영은 책을 줄 때보다 더 눈을 반짝이며 좋아하는 기색을 숨기지 못하는 부인의 얼굴을 보니 광대가 올라갔다. 자신이 생각한 것보다 훨씬 좋아한다. 스툴의 높이가 높지 않아 허리를 숙이다 못해 바닥에 주저앉을 것처럼 자세를 낮추는 것도, 갖고 싶었던 장난감을 받은 어린 아이처럼 기쁨에 가득찬 표정도, 제가 올려다본 밤하늘의 그 어떤 별보다 빛나고 있는 눈도 전혀 예상치 못한 것이었고 잘 어울렸다. 역시 좋아하는 게 없을 리 없지. 호영은 아주 뿌듯해져 입가가 말려올라갔다.
"조립해드릴까요?"
패파 옆에 쪼그려앉은 호영이 물었다. 장난치는 어린애들처럼 상자앞에 속삭이듯 물으니 괜히 더 웃음이 난다. 응. 그 어느 때보다 뚜렷하게 쳐다봐오는 부인에 작게 웃은 호영은 상자를 아예 바닥에 내려두며 주저앉았다. 아예 스툴까지 밀고 바닥에 앉는 패파는 의외였지만 구태여 의자에 앉으란 말은 하지 않았다. 오는 길에 몇번이나 반복해서 조립해봤던 호영은 눈을 대는 가장 얇은 부분의 원통을 들었다.
"여기가 눈을 대는 곳입니다."
그러면서 시작되는 가장 작은 렌즈를 보여줬다. 제 쪽으로 한껏 기울어진 몸을 느끼며 그 다음에 끼울 통을 맞춰 돌렸다. 끽끽 소리를 내며 맞아들어가는 원형 통은 어려운 부분이 다 끼워져있어서 그렇게 어려울 게 없었다. 마지막 부분이 다 맞춰들어갈 때까지 숨소리도 내지 않고 쳐다보는 패파를 힐끔였다.
"오늘 밤에 같이 별구경 할까요?"
호영은 고작 두 뺨 정도 얼굴이 떨어져있는 패파를 보며 물었다. 그러다 방금 전 책을 읽을 때도 흘려내려 걷어올렸던 잔머리가 내려와있는 걸 보고 자신도 모르게 손을 뻗었다. 바람 같이 스치는 손길. 당장이라도 별을 보고 싶어 그러자고 답을 하려던 패파의 입술이 그대로 멈췄다.
"오늘 날이 맑대요."
호영은 단순한 호의로 넘겨준 손을 거두며 덧붙였다. 자신만 놀란 건지 호영이 스치고 간 귓가가 뜨끈해서 목이 막힌 패파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 고개짓을 보며 웃은 호영은 상자 윗부분을 들어내고 아래에 있는 받침대를 꺼냈다.
"여기다 망원경을 얹으면 고정이 돼서 편하게 볼 수 있을 겁니다."
"..응."
패파는 다시 망원경으로 시선을 돌렸다. 바닥에 놓여진 차가운 금속의 통을 만지는 걸 본 호영은 막연하게 그런 생각을 했다. 부인이랑 친구는 될 수 있지 않을까. 백작 가문, 정략결혼 이런 거 다 떼고 그냥 사람 대 사람으로 친구 정도는 되어도 괜찮지 않을까. 피차 상대가 좋아서 한 결혼은 아니니까 죽고 못 사는 연인은 못 되어도 좋아하는 거 같이 해줄 수 있는 친구면 부인도 자신도 괜찮을 것 같다.
"곧 티타임 시간이죠?"
한껏 친밀해진 기분에 다정한 얼굴이 된 호영은 테이블 위에 놓인 작은 시계를 보며 몸을 일으켰다. 그러고 보니 부인을 너무 오래 바닥에 앉혀둔 건 아닌가 싶어진다. 그래서 귀부인을 모시듯 최대한 정중하게 손을 내밀었다. 그 손을 잠시 보던 패파가 손을 잡아왔다. 한손이 부족한 것 같아 다른쪽 팔을 잡고 중심이 잡힐 때까지 쥐고 있던 호영은 흐트러진 치마자락을 가볍게 정리해주었다.
"망원경은 제가 잘 올려둘게요."
매끈한 몸체를 들어올린 호영은 바로 뒤에있는 소파에 올려두었다. 그 행동을 물끄러미 보던 패파는 자신이 숨을 참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후으. 몰아뱉는 숨소리가 클 리도 없는데 호영에게 들킬 세라 숨을 죽였다. 일어나며 빠진 옆머리도 알아챘지만 귀 뒤로 넘기지 못했다. 뭔가 다 부자연스러운 것만 같아 가만히 서있으니 받침대까지 정리를 끝낸 호영과 눈이 마주쳤다.
"갈까요?"
가볍게 미소짓는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그 얼굴이 왜 자세하게 눈에 들어왔는지 모르겠지만 이제야 호영이 어떻게 생겼는지 눈에 들어왔다. 꽤 자주 휘는 것 같은 눈매도 짧고 굵게 난 눈썹도 가볍게 호선을 그리는 입매도, 이런 것들 때문에 사납고도 부드럽게 보이는 인상도. 이렇게 생겼구나. 새삼스레 쳐다보고 있는 패파는 기우뚱 고개를 기울이는 호영에 다시 정신이 돌아왔다. 큼. 목을 가다듬었다. 갈까요? 다시금 물어오는 호영에 대답 대신 발을 떼었다. 금방 따라와 나란히 걷는 호영을 보지는 못하고 괜히 정면만 향해 걸었다.
그냥 좀 이상하고 간지러운 느낌이었다.
조금 과한가. 호영은 저녁 식사를 한 이후 온 신경이 망원경 설치로 쏠려있었다. 지금도 부인이 잘 볼 수 있게 이쪽 저쪽에 올려둬보는데 창의 높이 때문에 그런가 성에 안 차는 기분이었다. 해가 저물고 저녁을 먹은 이후 3층에 올라와 있어서 하인들도 들어오지 않는 고요한 공간. 자신을 쳐다보는 부인 때문에 빨리 제대로 설치하고 싶었는데 테이블을 옮기고 책을 쌓아도 썩 마음에 드는 각이 나오지 않았다.
호영이 고민할 법도 한게 아무리 높게 쌓으려고 해도 여기 있는 테이블은 다 티타임용 테이블들이어서 기다란 망원경을 올려두기 쉽지가 않다. 그렇다고 바닥에 두기엔 부인께서 엎드리다시피 해야 눈에 댈 수 있었다. 실컷 별구경 하자고 해놓고 이대로 실망시킬 수가 없어 고민하는데 문득 별을 보기 좋은 위치가 떠오르긴 했다. 그런데 문제는 그게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는 꼭데기 옥상이라는 것이다.
".......부인."
깨끗할까? 부인께서 앉을 만한 곳이 있을지도 모르겠고 망원경을 올려둘 상자라던가 그런 게 있는지도 모르겠다. 아. 왜 이걸 확인해볼 생각을 못 했을까. 당황스러워서 식은땀이 나고 있는데 자신을 멀뚱하게 보는 패파는 자신이 해결책을 가지고 있을 거란 표정이었다. 당연했다. 자신만만하게 가지고 온 것도 자신이었고 별자리 보자고 설치한 것도 자신이었으니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혹시 옥상에 올라가보신 적 있으십니까?"
호영은 뭐라도 수습해야겠단 생각으로 입을 열었다. 만약 말도 안 된단 얼굴을 하고 있으면 재빠르게 사과를 해야지, 하며 쳐다보는데 옥상? 하고 되묻는 부인의 얼굴은 평온했다. 네. 저...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야 하긴 하는데..
"그래."
어쩐지 부인의 얼굴에 화색이 돈다. 머리를 긁적인 호영은 패파의 서재 맞은편에 있는 좁은 공간의 문을 열었다.
"창고가 아냐?"
호영을 따라나와 멀뚱하게 보고 있던 패파가 물었다. 네. 여기랑 반대편에도 사다리가 하나 있는데.. 여기는 부인께서 머무는 공간이라 하인들이 잘 안 씁니다. 척척 답을 해오는 호영에 자신이 집에 대해 모르는구나 싶어진 패파는 앞으로 누가 찾으면 여기에 숨어야겠단 생각을 했다.
"혹시 사다리 타실 줄 아세요?"
패파는 눈을 깜빡였다. 뭔가 특별한 장치가 있나? 두 팔다리만 있으면 할 수 있는 걸 물어봐와서 오히려 당황한 패파는 당연하지, 하고 답하면서도 사다리를 살폈다. 잠시만요. 초가 들은 랜턴을 밑에 둔 호영은 사다리에 올라 묵직한 돌문을 밀었다. 끼익, 중첩소리와 함께 쿵 소리를 내며 열린 문 위로 고개를 내미니 옥상 바닥에 뭐가 아예 없는 것 같진 않다. 적당히 괜찮아보이는 천을 깔고 그 위에 망원경을 두면 되겠다. 얼추 계산을 끝낸 호영은 다시 사다리를 내려왔다.
어느새 랜턴을 들고 있는 패파는 묘하게 들뜬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밤에 침실을 이탈하는 건 상상도 못할 일이었기 때문이다. 올라가? 물어보는 눈이 반짝였다. 호영은 네, 잠시만요ㅡ하고 답을 하며 황급히 서재로 돌아왔다. 소파 옆에 있는 작은 테이블 위에 있는 긴 천을 가볍게 접어들고 부인이 앉을 만한 걸 찾다 담요를 집었다. 우선 자리 먼저 만들어 보고 망원경을 가지고 와야지.
"여기 잠시만 계세요 부인."
호영은 천들을 한쪽 어깨에 걸치고 사다리를 올라갔다. 대충 둘러보니 뭐가 담겼는지 모르겠지만 냄새는 크게 안 나는 나무 궤짝들이 있다. 이걸 높이에 맞게 쌓고 천을 깔면 망원경을 올려두기 좋지 않을까 싶어 갯수를 새어 본 호영은 팔을 걷어붙였다. 테이블 높이보단 높아야하니까 세개쯤 쌓아 올리면 되겠다. 척척 쌓아올리던 호영은 대충 어림잡아 쌓은 높이를 보며 짙은색의 천을 덮었다. 멀끔해진 외관에 만족스러워진 호영은 남은 궤짝을 보다 고민에 잠겼다. 담요를 깔면 부인이 앉아도 되는 건가? 뭔가 좀 더 푹신하고 깨끗해야 할 것 같아 고개를 돌리는데 저쪽 끝에 의자 비슷한 모양이 있어 걸어갔다. 다행스럽게도 의자가 있나보다. 물론 부인이 안기엔 좀 딱딱하고 낡아보이지만 궤짝보다얀 낫겠지.
"..! 부인"
의자를 들고 쌓아둔 궤짝 앞까지 가는데 잠깐을 못 참고 머리를 내밀고 있는 패파를 발견한 호영은 요란스레 의자를 내려놨다. 탁 트인 넓은 전경과 시원한 공기에 동공이 확장된 패파와 달리 부인이 떨어질까봐 걱정하고 있는 호영은 양 손을 뻗었다. 부인 치마가 길었던가? 제가 두 손을 잡고 당겨드리면 발에 꼬이려나? 그런 걱정과 달리 패파는 제 손을 잡았고 아주 쉽게 옥상으로 올라왔다.
"여기서 봐?"
혹시 마음에 안 드나 싶어 걱정스레 봤지만 부인의 눈은 오해하기 힘들 만큼 좋아서 반짝이고 있었다. 네, 하고 답한 호영은 의자를 가져다 두며 담요로 완전히 덮었다. 좀 부족한 것 같지만.. 쿠션을 챙겨와겠단 생각을 마친 호영이 패파를 쳐다봤다. 제 걱정이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보일 만큼 목이 꺾어져라 하늘을 올려다보는 패파는 행복해보였다.
"망원경을 빨리 가져와야겠네요."
자신도 모르게 웃으면서 말한 호영은 응, 하고 답을 하는 패파와 눈이 마주쳤다. 반짝반짝한 눈동자를 보니 멀리 있는 별보다 쳐다보고 있는 눈이 제겐 더 별 같았지만 아무래도 부인께선 별이 보고싶으시겠지. 다시 한번 웃어보인 호영은 금방 사다리를 붙잡고 내려갔다.
그런 호영이 내려가는 걸 본 패파는 그럴싸하게 만들어진 의자에 앉아보았다. 진짜 밤하늘이다. 책에서 수십번 읽고 보았던 하늘을 그 어떤 창도 없이 정면으로 올려다보고 있었다. 목 아프게 창 밖으로 몸을 내밀지 않아도 되고 누가 올까봐 전전긍긍하며 변명거리를 생각해내지 않아도 되었다. 이 자유가 좋은 건지 탁트인 밤하늘이 좋은 건지 굳이 구분할 필요가 없었다. 패파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숨을 제대로 쉬고 있단 느낌을 받았다.
"부인."
패파는 하늘을 올려다보다 말고 망원경을 제 몸보다 소중하게 끌어안고 올라오는 호영을 보며 웃음이 났다. 사실 그렇게까지 웃긴 모습도 아니었는데 이 상황이 너무 유쾌해서 웃지 않을 수 없었다. 키득키득 멈추지 않는 웃음에 어깨까지 떨고 있으니 머쓱하게 걸어온 호영도 어색하게 웃는 얼굴을 해보였다.
"잘 웃으시네요."
그 말 때문인지 웃음은 금방 멈췄지만 호영은 아무래도 좋다고 생각했다. 적어도 자신이 웃겨서 웃는 건 멈춘 것 같으니까 민망하지 않은 척 하기에 좋았다. 허리춤에 매달아온 받침대를 빼서 천이 덮힌 궤짝에 올려두었다. 얼추 자리를 잡고 망원경을 올려두니 앉아있는 부인이 올려다보기 딱 좋은 위치가 되었다. 새삼 상단일 하면서 물건 크기를 어림잡아 맞추는 게 늘었다 싶은 호영은 뿌듯하게 패파를 보았다. 패파는 자신을 한번 보더니 고개를 숙여 망원경으로 눈을 가져다대었다. 깜빡깜빡. 몇번 감겼다 뜨이며 초점을 잡는가 싶더니 곧 입이 벌어지는 게 보였다.
부인께선 생각보다 사람을 뿌듯하게 만드는 재주가 있으시다. 뭐가 그렇게 신기한진 몰라도 눈도 못 떼고 입도 못 다물고 있는 패파를 보니 자신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그래서 옆에 있는 궤짝에 앉은 호영은 마음에 드십니까? 하고 물었다. 넋이 나간 부인은 답을 돌려주지 않았지만 이미 답을 들은 정도가 아니라 보고 있는 호영은 입꼬리를 가만히 내려두지 못했다. 대신 패파가 들여다보고 있는 하늘을 같이 올려다봤다. 반짝거리는 별들은 매일 같은 자리에 있었던 것 같은데 한번도 길게 들여다볼 생각을 안 했다.
예쁘긴 하네. 크게 감흥이 생긴 건 아니지만 부인이 좋아한다니까 자신도 관심을 가져봐야겠다. 그래도 자신은 여전히 사물보단 사람을 대하는 게 더 잘 맞기는 해서 금방 부인에게로 시선이 돌아간다. 옷이.... 얇은 것 같은데. 위에 두를 것 좀 가져와야겠다. 또 필요할 만한 게 뭐가 있는지 고민해보던 호영은 몸을 일으켰다. 완전히 빠지셨군. 제가 일어서건 말건 망원경에서 눈을 뗄 생각을 안 하는 패파를 보며 웃은 호영은 담요를 챙기러 내려갔다.
그러나 부인께서 밤하늘을 보는 기간은 그리 길지 못했다. 사교 행사 때문에 바빠져서도, 상단일이 가장 바쁜 가을이 와서도, 그탓에 낮잠을 잘 수 없어서도 이유가 되었지만 근본적인 이유는 다른 것이었다. 아니면 이 모든 상황 때문에 나온 결과이거나.
호영은 목이 부어서 목소리도 잘 안 나오는 패파 앞에 심각한 얼굴로 앉아있었다. 밤하늘을 보는 건 정말 좋았다. 한 삼일쯤은 부인께서 침대로 내려가기도 싫어할 만큼 들떠서 보냈고 뒤의 이틀은 졸음이 낀 눈으로 밤하늘 반, 눈꺼풀 반을 쳐다봤다. 그 이후 이틀은 거의 기절상태여서 올라가지도 못했는데 컨디션이 안 좋다고 말할 때쯤 아무런 조치도 못 한게 문제가 되었다. 지금 부인은 담요를 세개나 덮고있는데 추운지 재차 여미는 중이었다.
"아직도 추워요?"
호영은 파르르 떠는 부인이 안쓰러워 담요가 두텁게 둘러진 팔을 쓰다듬었다. 끄덕끄덕. 뜨거운 차도 마시고 담요도 둘렀는데 추우시다니. 열이 떨어지셔서 그런가. 열심히 담요 위를 문지르다 말고 손을 든 호영이 붉은 뺨위로 손등을 가볍게 대었다. 확실히 차갑다. 열이 막 나더니 이제 오한이 드셨나보다. 제 손보다 한참 차가운 뺨에 걱정이 되어 쳐다보니 아파서 맥아리없이 떠진 눈이 보였다. 부인. 뭐라도 해야할 것 같아 부탁할 것을 물어보려 할 때였다.
"잠깐"
목소리가 갈라져서 마구잡이로 튀어나왔다. 호영은 급작스레 불러지는 목소리에 패파를 쳐다보았다. 네? 반사적으로 되물으니 언제 올려졌는지 모를 손이 제 손을 잡아왔다. 그리곤 쭉 딸려간 손이 자의가 아닌 타의로 원상복귀되어서 호영의 입술이 꾹 다물렸다. 혹시 백작가 따님도 추울 때 제일 따뜻한 게 체온이란 걸 알까. 당연한 물음을 곱씹는 건 갑작스런 접촉이 당황스럽기 때문이다. 제가 먼저 손을 가져다댄거였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닿은 접촉에 놀라 새삼 눈앞에 있는 존재가 제 부인이란 걸 상기해보았다.
호영은 소리없이 목을 가다듬었다. 그냥 괜히 긴장이 되었다. 다음에 제가 할 행동에 사심이 없단 걸 표현하고 싶은데 그걸 어떻게 해야할지도 모르겠고 머릿속이 복잡했다. 그럼에도 호영은 제 행동을 멈추지 않았다. 손을 빼니 자연스레 따라오는 눈동자를 보았다. 아파서 희미하게 뜨인 눈동자가 자신을 쳐다봐왔지만 그 다음 자신의 행동에 그 눈동자가 크게 뜨이지만 않게 바라는 중이다. 그래도 지난 일주일간 부쩍 친해졌으니까 이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이제 패파는 부탁하면 뭐든 해주는 느낌으로 자신을 신뢰하고 있었다. 적어도 자신 앞에선 불편한 기색이 없었다.
호영은 겹겹이 있는 담요를 걷어내지 않고 패파를 감싸안았다. 혹시나 불편해하면 귀족이 아닌 일반 가정에선 추우면 안아준다는 말이라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부인께선 아무 말이 없었다. 오히려 고개를 돌려 제 어깨 위로 뺨을 대더니 편안한 자세를 찾는 것처럼 꿈틀거렸다. 움직임이 멈출 때까지 긴장한 채 마음을 조리고 있던 호영은 이윽고 가만히 기대어진 몸에 숨을 내쉬었다. 허리께에 두른 손을 조심스레 들어 등 위로 얹었다. 뛰고 있는 맥박이 자신의 맥박인지 기대어있는 부인의 맥박인지 구분하기 힘들었지만 조금 빠른 것도 같다. 그것이 괜히 의식된 호영은 목을 가다듬었다. 이렇게 긴장이 될 때면 괜한 농담을 덧붙이지 않고선 참을 수가 없었다.
"부인. 다음 번엔 망원경 옆에 캠프파이어라도 두어야겠습니다."
푸흡. 호영은 제 가슴팍에서 퍼지는 웃음소리에 덩달아 웃었다. 연달아 들려오는 기침소리에 아래를 쳐다보니 미간이 찌푸려진 게 보인다. 호영은 금방 걱정스런 얼굴이 되어 다시 등을 토닥였다.
"그래도 별은 볼 거야."
"...알겠어요. 다음번엔 장작도 준비해둘 테니까 일단 낫기부터 합시다."
긁히듯 나오는 목소리가 신경쓰여서 인상을 쓴 호영은 부인이 더 이상 말을 하지 않도록 달래었다. 물론 그 노력은 금방 무산되었다.
"....이대로 잠들면 어떡해."
"침대에 눕혀드릴게요."
"....여기서 좀 먼데?"
"그 정도는 옮겨드릴 수 있어요."
".....그ㄴ"
"부인. 말을 좀 더 하면 목소리가 완전히 안 나올 것 같습니다.."
호영은 짐짓 단호한 목소리를 내었다. 그러나 패파는 거기에 굴할 사람이 아니었고 하려던 말을 마저 해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었다. 그럼 지금 침대에 누울래. 그러면서 몸을 뗀 패파는 호영과 눈이 마주쳤다. 패파는 네가 들어서 옮기는 거면 지금 걸어가겠단 의미로 말했고 호영은 지금 들어서 옮겨달라는 걸로 이해한 것만 달랐다. 담요를 풀러낸 호영은 소파에서 금방 패파를 안아들었다. 이미 두 발이 땅에서 들린 패파는 당황스런 입을 여는 대신 떨어지지 않게 호영을 붙잡았다.
호영은 이불을 젖히고 그 위로 패파를 눕혔다. 그 위로 이부자리 정리를 해주는데 아무리봐도 이불이 얇다. 아쉬운 대로 두르고 있던 담요들을 챙겨와 겹겹이 쌓아 덮었다. 내일 빠지면 안 되는 모임 자리가 있는데 그때까지 좀 나아질 수 있는지 모르겠다. 다시금 뺨에 손등을 댄 호영은 아직도 차가운 것 같아 담요를 목끝까지 끌어올렸다. 아플 때 엄마가 어떻게 해줬더라. 어렸을 때 빼고 집에서 아파본 기억이 없는데다 타지에서 아프면 눈감고 자는 것 외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딱히 슬픈 기억은 아니었는데 어쨌든 제 기억으로 도와줄 수 있는 건 별로 없었다.
그리고 패파는 무진장 추웠다. 호영의 체온이 원래 높은 건지, 제가 너무 추운건진 몰라도 따뜻했던 온기가 사라지니까 너무 춥다. 거기다 이불은 왜이렇게 차가운지 일자로 뉘어진 몸이 닿는 족족 얼어붙는 기분이었다. 춥다. 당장 열이 펄펄 나는 뜨거운 욕조에 들어가고 싶을 정도로 추웠다. 호영이 덮어준 담요 따위로는 이 추위를 다 가시게 할 수 없을 것만 같았다.
"호영아."
"어? 아, 아 네?"
호영은 눈이 마주친 패파를 홀린 것처럼 봤다. 부인께서 내 이름을 부른 적이 있던가? 너무 자연스럽게 불러서 자신도 모르게 친구처럼 답을 해버렸다. 정신을 붙들고 다시 패파를 보는데 자신이 너무 잘 아는 눈이다. 자신한테 뭔가 부탁했을 때 그거 어딨냐는 눈. 아파서 좀 흐리멍덩하긴 했지만 그런 표정이었고 호영은 자신도 모르게 뭘 줘야하나 생각하다 떠오른 게 있었다. 소파에서 침대로 다 옮기고 남은 하나.
근데 여긴 침대 위인데. 아니 부부니까 괜찮나. 아니 그치만. 호영은 별별 생각을 하다 말고 다시 패파와 눈이 마주쳤다. 그래 원래 부인은 목적이 목적인 사람이다. 제가 무슨 생각을 하든지 어쨌든 원하는 걸 이룰 생각밖에 없을 것이다. 그래.. 그렇지. 엉거주춤하게 담요를 들추다 말고 제쪽으로 너무 얼마 안 남은 침대를 본 호영은 빙 둘러 반대로 향했다. 머슥하게 이불 사이를 파고들었다. 그러고 보니 늘 눕던 위치가 바꼈다. ..이건 중요한 건 아닌가. 자신도 모르게 심장이 벌렁거려서 아무 생각을 다하고 있는 호영은 패파 옆에 누웠다.
엄마처럼 안아줄 수도 없고 팔만 딱 붙어 누워 패파를 힐끔이는데 자연스레 돌아누워진 얼굴이 보였다. 차분하게 감겨있는 눈인데도 괜히 볼 수가 없어 천장을 쳐다봤다. 또 아까처럼 전신에 심장이 뛰고 있는 게 느껴졌다. 전과 달리 반대쪽 어깨에서 느껴지는 숨도 팔에 감긴 체온도 누워있어서 그런지 더 잘 느껴지는 것 같다.
"....부인."
불편한 건 자신이지만 혹시나 부인은 불편한 게 없나 물어보려고 패파를 불렀다. 그럼에도 없는 답에 힐끔 아래를 내려다보니 목적을 달성한 부인은 잠기운에 휩쓸려 정신이 없는 것 같았다. 실제로도 패파는 따끈따끈한(?) 체온 때문에 얼어붙은 피부가 녹는 기분이었다. 호영은 추위를 쫓는 건 외엔 아무 생각이 없어보이는 패파를 보고서야 의식이 덜 되는 것 같아 힘을 풀 수 있었다. 후. 숨을 고르고 다시 패파를 보았다. 매일 같이 본 얼굴을 처음 들여다보는 것처럼 들여다보았다. 이렇게 생겼구나. 아무런 표정도 없는 얼굴은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더 단정하고 깔끔하다. 이마, 눈썹, 눈, 코, 입, 턱까지 하나하나 쳐다보고 시선이 다시 눈까지 올라갔을 땐 제 몸이 살짝 틀어져 부인쪽을 향해 있었다.
참 곱다. 귀족은 귀족이라고 땡볕에서 일 한번 안 해봤을 얼굴은 그을린 자국도 없었다. 부인은 해보단 달과 별을 더 좋아해서 그런가보다. 한달쯤 지내보니 집 안의 삶은 정말 단조로웠다. 제가 늘 바쁜 상인 가문에서 태어난 이유도 있겠지만 그걸 감안하더라도 귀족의 삶은 단조롭고 지루했다. 태생이 다르니까 더 그렇게 느낄지도 모르겠지만 그런 의미에서 부인이 왜 밤하늘을 좋아하는지 어렴풋이 알 것도 같았다. 일상이 너무너무 재미없어서 고작 옥상에 올라가 밤하늘을 올려다보는 것이 그렇게 재밌는 지도 모르겠다.
그러다 불현듯 제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이제 뭘 더 하면 되냐고 애나 낳아주면 되냐 묻던 어조와 표정이 선명했다. 그것을 한참이나 곱씹어보던 호영은 오지랖과 넘겨짚기를 안 하기 위해 몇번이나 생각을 정리했다. 그래도 다행인 건 부인께선 진심도 아닌 행동을ㅡ아마도 귀족들은 매너와 예의라고 포장할ㅡ뻔뻔하게 하며 앞뒷말을 다르게 하는 유형이 아니었다. 모르는 게 있으면 차라리 물어보는 게 더 정확할 테다.
호영은 생각을 정리하곤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18년 인생 중에 고작 한달 본 부인이지만 상단 일때문에 다양한 사람을 만나봐서 알 수 있었다. 부인은 단순하고 꾸밈이 없다. 원하는 것이 명확한데 그렇게 원하는 것조차 복잡할 게 없었다. 귀족이란 가문을 의식하지 않고 생각하면 정말 또래 친구와 똑같았다. 그렇게 다시금 곱씹은 호영은 괜한 친밀감이 솟아났다. 친구가 되어 주겠다는 말은 꼭 해야지. 그렇게 생각하며 아무런 거리낌도 없이 팔을 뻗은 호영은 완전히 돌아누워 패파를 마주 보았다. 기분 좋은 두근거림은 이유를 규정할 필요가 없었다. 그냥 느끼는 그대로 입가를 말아올리며 이불을 슥슥 눌러 정리해주었다.
부인이 눈을 떴을 때 몸이 좀 가벼워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다행스럽게도 부인의 건강은 금방 호전되었다. 몇시간인지 모르게 따뜻한 호영을 붙들고 잔 덕인지 꽤 괜찮아진 컨디션으로 일어난 패파는 평소보다 두툼하게 옷을 입는 것 정도로 마무리했다. 그러나 문제는 다른 곳에 있었다. 몸이 멀쩡해진 것과 별개로 밤하늘을 볼 때 뭘 챙겨올라갈지 목록을 짜고 있는데 호영이 사라졌다. 정확하게 말하면 사라진게 아니고 일을 나갔다. 그렇지만 패파는 이 괘씸한 행동을 용납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분명 호영이 먼저 제 몸이 좀 더 괜찮아지고 나면 또 올라가서 보자고 했기 때문이다. 오늘쯤 올라갈까 했던 자신이 무슨 말도 하기 전에 이렇게 쏠랑 상단일을 하러 갈지 꿈에도 몰랐다.
"...................."
"................"
열흘이라고. 패파는 평화로워진 이후의 호영이 그렇게까지 시끄러웠단 생각은 못 했는데 식탁 가득 채우는 적막감에 짜증이 나고 있었다. 열흘? 열흘????? 오늘 오전에 웃는 낯으로 금방 다녀오겠단 말을 한 호영이 생각나 다시 울컥 화가 치민다. 열흘이 금방인가? 내가 시간관념이 잘못 됐나??? 열흘이 어떻게 금방이지? 그렇게 쿡쿡 힘이 실린 채 방울토마토를 못살게 굴던 패파는 점심을 먹다 말고 포크를 내려두었다.
뭐, 호영이 없다고 해서 위로 못 올라갈 것도 아니고 별이 없어지는 것도 아니었다. 괘씸하지만 망원경은 윗층에 잘 있으니 제가 가지고 올라가서 보면 되었다. 그래, 그러면 되는 거였다.
*
호영은 머리가 아주 바쁘게 돌아갔다. 혹시 제가 뭘 잘못했는지, 아님 귀족 예법에 어긋나는 절차가 있었는지 몇시간 째 고민중이었다. 열흘정도 길이면 비워서는 안 되는 기간인가, 아님 제가 상단 일을 하는 사이에 집에 무슨 일이 있었나. 있었다면 누구한테 물어봐야 부인 귀에 안 들어가고 조용히 물어볼 수 있는 건가. 이렇게 복잡한 머릿속에서 명확한 답이 나올 리 없었다. 어째 결혼한 직후보다 더 찬바람이 부는 것 같은 부인의 얼굴은 도무지 똑바로 쳐다볼 수가 없는 것이었다. 시간이 애매하게 갈려서 점심 식사는 이미 했다는 부인은 서재에 앉아 책만 열심히 읽고 있었고 자신은 그 모습을 힐끔이는 중이었다.
드르륵. 밀려나는 의자소리에 움찔한 호영은 제쪽은 쳐다도 안 보고 바깥쪽으로 나가는 걸음에 저절로 눈이 피해졌다. 진짜 사과라도 해야하나 싶어진 찰나 호영의 눈에 들어온 게 있었다. 가벼운 실내용 슬리퍼 사이로 보이는 시퍼런 멍자국에 자신도 모르게 벌떡 일어났다.
"부인."
호영은 아슬하게 패파를 잡아세운 채 몸을 숙였다. 아니 발등이 왜. 말 문이 턱 막혀서 손을 뻗는데 금방 뒷걸음질 쳐 빠진 발이 눈앞에서 사라졌다.
"부인...!"
바로 일어선 호영은 왜 다쳤는지 어쩌다 이렇게까지 멍이 들었는지 묻다 말고 패파와 눈이 딱 마주쳤다. 그리고 패파는 좀 서러워졌다. 뭔가 엄청 억울한데 따지고 보면 호영의 잘못은 하나도 없었다. 그냥 자신 혼자 호영이 일하러 나간 것에 화가 나서 별보러 올라갔고 망원경을 설치하다 떨궜을 뿐이다. 그것 때문에 밤하늘의 별은 하나도 못 봤고 망원경도 그대로 옥상 위에 있지만 호영의 잘못은 아니었다.
"누가 잘못했습니까?"
그렇게 묻는 호영은 제가 그렇다고 답하면 당장이라도 화를 내러 갈 얼굴이었다. 패파는 어, 하고 답하고 싶은 굴뚝같은 마음을 참았다. 그렇게까지 유치한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다. 논리적이지도 않고 유치한 사람만 되느니 차라리 발이 나을 때까지 호영의 질문들을 무시하는 게 나았다.
"ㅡ부인"
"됐어. 아무렇지 않으니까 그만 물어봐."
패파는 단호하게 갈무리를 했다. 거기에 뭐라 더 물어보려던 호영은 입을 닫았고 패파는 목적지 없는 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패파는 호영에게 느낀 화와 짜증, 허탈감, 서운함 등의 복합적인 감정이 이렇게 빨리 사라질지 몰랐다. 원래 이렇게 물욕이 강한 사람이었나, 아니면 얘는 나를 진짜 좀 잘 아나 싶은 선물을 금방 받았기 때문이다. 반나절가량 냉전(?)이었던 분위기와 달리 저녁을 먹고난 패파는 보여줄 게 있다며 응접실로 데리고 간 호영을 따라간 이후 눈이 두배쯤 커졌다. 하인들 십여명을 데려다 고이고이 옮겨둔 거대한 망원경은 밤하늘의 작은 먼지까지도 볼 수 있을 것 같은 크기였다.
아, 씨. 진짜 좋다. 패파는 이 싸움(?)에서 자신이 졌음을 인정했다. 사실 이기고 지는 건 순전히 제 마음속 일이고 어딜 다녀올 때마다 제가 좋아하는 것을 넙쭉넙쭉 바치는 호영이 싫을 수가 없었다. 표정을 숨기기엔 너무 좋아하는 것이었고 성정마저 솔직한 패파는 호영이 보기에도 행복한 얼굴로 거대한 천체 망원경을 살펴보았다.
"옥상에 천막을 쳐두고 가져다 두면 훌륭한 관측소가 될거에요."
확연히 보이는 표정변화에 상단에 있는 내내 생각했던 구상을 말한 호영은 마음이 편해졌다. 다행스럽게도 부인은 정말 감정에 솔직했고 원하는 게 분명하시다. 오늘 밤이라도 당장 보실 수 있게 해드리고 싶지만 빨라도 내일 밤까지 설치가 가능할 테지. 아쉬우면 기존의 망원경을 오늘까지만이라도 쓰라고 달래어보잔 생각까지 마친 호영은 망원경에서 눈을 못 떼는 패파를 보며 슬핏 웃었다.
"....그리고 부인."
망원경 앞에 둔 의자에 앉아 렌즈를 들여다보는 패파는 제 부름에 딱히 반응하지 않았지만 그편이 더 나았다. 하인에게 부탁한 연고 통을 집어든 호영은 망원경에 온 관심이 쏠린 패파의 발을 집어들었다.
"?!"
갑자기 쑥 벗겨지는 양말에 깜짝 놀란 패파가 발을 빼려는데 잡힌 발목이 빠지지 않았다. 야. 다급한 목소리에도 잠시만 기다리라는 말을 한 호영은 진한 액을 퍼올리며 멍자국 위에 발랐다. 패파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 퍽 조심스런 손길은 여간 간지러운게 아닌데 그걸 내려다보는 호영의 표정은 심각해보여서 뭐라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닿는 살결은 이번에도 뭔가 조금 간지럽고 묘하다.
"망원경은 내일까지 옥상에 설치해두겠습니다."
연고를 꼼꼼하게 바른 호영은 패파가 듣기 좋은 소리를 골라 하며 몸을 일으켰다. 옆에 있는 천으로 손을 닦다 생각해보니 여기서 연고를 바르면 양말을 다시 신을 수가 없었다. 계산 착오다 계산 착오. 난감한 낯빛이 스친 호영은 제가 안아다 모셔다드리는 편이 훨씬 낫다고 결론을 내렸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하인들 다 있는데 한쪽 발만 맨발인 채 돌아다니는 건 귀족 부인이 하실 일은 아닌 것 같았다. 일단 부인 기분이 좋으시니까 좀 더 망원경을 둘러보시는 걸 기다려봐야겠다.
한편 패파는 내일부터라는 말에 오늘 당장은 안 되냐고 물어보고 싶은 걸 참는 중이었다. 발을 다친 이유도 그렇고 열흘 내내 심통났던 마음도 그렇고 제 발 저려서 묻기가 그랬다. 오늘 밤만 참으면 내일부터는 또 이렇게 큰 망원경으로 볼 수 있으니까. 그런 마음으로 물끄러미 들여다보던 망원경에서 시선을 떼었다. 자연스레 떨어진 시선은 연고가 진득하게 발린 발등으로 향했다. 아.. 근데 아직 원래 망원경이 옥상에 있는데.. 그건 어떻게 말하지. 오늘 밤에 몰래 가지고 내려올까. 그래야겠다. 호영이 잠든 사이에 살짝 올라갔다오면 되겠다. 그런 생각을 할 때쯤 언제부터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는지 모를 호영과 눈이 마주쳤다.
"....열흘 동안 잘 지냈습니까?"
나긋한 목소리였다. 더불어 그렇게 물어보는 호영의 표정이며 목소리에 온기가 가득했다. 패파는 기분이 이상해졌다. 안부를 묻는 거야 모임 자리에서 매번 하는 인사치례인데 어째서인지 호영의 물음은 진짜 잘 지냈냐고 묻는 기분이었다. 안부를 묻는 게 원래 이런 물음이었나. 원래라면 이 다음에 용건이라던가 그런 말이 나와야하는데 답을 기다리는 것처럼 느껴져서 눈만 깜빡였다. 뭐, 잘 지냈다고 하면 되는 건가. 아님 보다시피 발을 다쳤다고 해야하나. 그러나 패파는 제가 생각하는 것만큼 퉁명스런 대답을 내놓지 못했다.
"........어. 큼. .....너는?"
그 물음에 호영의 눈이 좀 커졌다. 그 표정과 달리 별 일 없이 무탈하게 일정을 마무리했다는 답은 술술 나왔지만. 그렇군. 패파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패파는 답을 하며 괜스레 몸을 일으켰다. 뭔진 몰라도 대화를 더 이으면 이상한 기분이 들 것 같았다. 차라리 올라가서 책이나 마저 읽던가 해야되겠다. 성큼성큼 뻗어지는 걸음. 예상치 못한 속도감에 화들짝 놀란 호영이 패파 앞을 가로막았다. 뭐야. 딱 그런 얼굴로 올려다보는 부인에 시선을 내리니 따라 내려온 시선이 발치에 닿았다. 패파가 보기에도 양말이 신겨진 발과 시퍼렇게 멍든 발이 나란히 있는 건 우습긴 했다. 그래서 뭐 양말이라도 다시 신으라는 건가 싶어서 고개를 들려는 찰나 패파의 몸이 먼저 들렸다.
깜짝 놀래서 숨이 턱 막힌 패파는 넌 말도 없이 사람을 드냐고 묻지도 못하고 어깨를 잡았다. 그리고 서야 생각난 건데 얘는 스킨십에 거침이 없다. 지난번에 아팠을 때 먼저 안은 것도 그렇고 지금도 그랬다. 근데 이게 또 명분이 없는 건 아니라서 뭐라 할 수도 없었다. 근데 왜 이렇게 가까운 것 같지. 안은 자세 상 안 그럴 수도 없겠지만 패파는 괜히 목께가 뜨끈한 것 같았다. 군말없이 3층 방까지 안겨오는 것이 이렇게나 숨죽일 노릇인지.
"소파에 앉혀드릴까요? 아니면 책상?"
"...책상."
예상과 같은 대답에 슬핏 웃은 호영은 참 알기 쉬운 부인이란 생각을 했다. 책상 의자 앞에 내려드리고 책장을 보는데 부인께서 책을 많이 읽으셨나보다. 읽은 책은 아래로 내려두고 남은 책은 윗부분에 두는데 두어권밖에 남지 않았다. 책을 더 가져와야겠단 생각을 한 호영은 금방 책으로 시선이 돌아가있는 부인을 보며 머리를 굴려보았다. 저녁 전까지 책을 가지고 올까, 아니면 밀린 집안일을 좀 해야 하나. 아무래도 책을 가져오는 게 부인께서 더 좋아하시겠지.
"저녁 식사 전에 부인께서 읽을 책을 좀 더 구해와야겠습니다."
패파는 글자가 들어오지 않는 종이 위에서 고개를 돌렸다.
"벌써 나가?"
아. 뭐라는 거야. 패파는 은연중에 하고 있던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했음을 깨달았다.
"...네?"
"....아니, 그...."
그러니까 열흘이 생각보다 길었다. 분명 자신은 굉장히 독립적이고 무엇이든 혼자 척척 해왔던 사람이었지만 이 집에 온 이후 호영과 하루 종일 붙어있다시피한 것도 사실이었다. 원래도 딱히 살갑게 곁에 둔 하인이 없었지만 여기는 더 없었고 대부분의 시간을 3층에서 보내다보니 필요한 일이 아니고선 대화하는 사람도 없었다. 그래서 이 집에서 대부분의 대화는 호영과 했다는 걸 열흘 내내 깨닫기만 했다. 인정하고 싶진 않지만 호영은 눈치도 빠르고 다정해서 제게 필요한 것들은 먼저 해두는 편이었고 이것 또한 열흘 내내 느낀 것이었다. 하다못해 잘때 이부자리를 정리해주는 것조차도 익숙해졌다는 것을 어제 막 시인했다.
"......부인이 원하시면 옆에 있겠습니다."
저렇게 편히 웃는 얼굴로 소름 돋는 말을 하는 것조차 참을만 할 정도로. 떨어져있는 작은 쿠션 의자를 가져와 옆에 앉는 것은 이 집에 와서 본 적 없는 행동이었는데 뭐라하지 못했다. 그냥 조용히 고개만 돌려 책을 읽기 위해 애썼다. 혹시 방금 제 말이 되게 이상했나. 벌써 나가냐고 물은 것 외엔 별 다른 말을 안 했는데. 옆에 있는 걸 원한다고 말하지 않았는데. 거절하지 않은 게 이상해보일까. 그냥 나가서 책이나 구해오라고 할까. 아님,
"....부인."
"......"
"....밤하늘 보고 싶으시죠?"
갑작스런 질문이 어려운 것도 아닌데 패파는 호영을 쳐다볼 수가 없었다.
"상단 일은 가끔, 아니 사실 거의 매번 밤 늦도록 이동을 합니다. 이번에도 열흘 내내 밤하늘을 올려다볼 일이 있었는데 불현듯 부인이 떠오르더라고요. 부인께서 밤하늘을 좋아하시는 이유가 뭘까. 매번 읽는 책에서 무슨 말을 하길래 별을 그렇게 유심히 들여다보실까. 보면 뭔가 재밌는 게 있는 건가."
"........."
"그런 생각을 하면서 밤하늘을 보는데 저는 아무리 생각해봐도 뭐가 재밌는지 잘 모르겠더라고요. ..아무래도 부인께서는 배운 것도 저보다 많으시고 아시는 것도 많으니까 재밌으시겠지만.. 저는 그냥 짙은 밤하늘이랑 반짝이는 별 정도가 끝이었습니다."
"........."
"그래서 돌아오면 그냥 부인은 왜 밤하늘이 좋은지, 별을 보면 어떤 게 보여서 재밌는지... 한번은 물어보려고 했습니다."
생각보다 시시한 이야기다. 분명 내용은 그랬다. 그런데 패파는 왜 답을 못 하겠는지 알 수가 없었다. 밤하늘. 별. 그걸 올려다보는 건 지금 생각해도 재밌지만 뭔가 호영이 요구하는 것처럼 구체적이고 세밀한 이유가 있는 건 아니었다. 호영의 말마따나 별에 재밌는 모양이 그려져있는 것도 아니었고, 애당초 반짝이는 걸 조금 더 크게 볼 뿐이었다. 그럼에도 밤하늘은...
".....아무도 모르잖아."
"...네?"
"........물론 너는 알지만. 내가... 내가 뭘 하는지 아무도 모르잖아."
호영은 이해하기 어려운 말을 곱씹었다. 제 배움이 부족해서인가? 아무도 모른다는 게 무슨 뜻이지. 밤하늘에 대해 아는 사람이 없다는 것인지.. 하지만 부인이 뭘 하는지 모른다고 하였는데.
"밤에는 내가 뭘 해도 아무도 모르니까.."
이제 호영은 패파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 했다. 밤에 고작 하는 일이 밤하늘 올려다보는 건데... 그게 남들이 본다고 문제가 된다는 걸까.
".....부인은 하늘을 올려다보면 안됩니까?"
의문을 넘길 수가 없어 물어보니 그제야 눈을 마주한 부인은 자신을 멀뚱히 쳐다보기만 했다. 그러다 아주 조금 표정에 균열이 일었다. 희미하지만 분명 웃음이었고 그건 전혀 다른 분위기를 내었다.
"진짜 안 되는 겁니까? 왜요?"
이제 패파는 키득키득 웃기 시작했다. 제 질문에 답도 없이 웃어서 민망하지만 웃는 건 보기 좋았다. 그리고 어쩐지 패파는 그 물음이 고마웠다. 전에도 느꼈지만 호영은 정말로 귀족 가문에 대해 하나도 몰랐고 귀족 영애가 하지 말아야 하는 일은 더더욱이나 몰랐다. 언젠가 알게 되더라도 꼭 저렇게 물어봐줄 것만 같아서 그게 참 좋았다.
"호영아."
웃음이 가득 머금어진 목소리였다. 그리고 그건 호영에게 예상치 못하게 성큼 다가왔다. 이따금 이름을 불렀던 것도 같은데 그 부름보다도 훨씬 가깝고 친밀해진 거리였다. 이제 좀 부인을 만난 것도 같은 느낌.
"너 말 탈 줄 알아?"
"....말이요? 네, 탈 줄 압니다."
"그럼 검은 다룰 줄 알아?"
".....실제로 싸워본 적은 없습니다."
"그래. 그럼 나 말 타보고 싶어."
"말이요? 지금, 아니. 발 다 나으시면 태워드릴게요."
패파는 광대를 내리는 것이 쉽지 않았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제가 뭘 하겠다고 했을 때 막지 않는 사람이 바로 앞에 있었다. 이게 얼마나 신기하고 기쁜 일인지 호영은 알 턱이 없었지만 그래서 다행이었다. 아주 조금씩 제가 하고 싶은 걸 해봐야겠다. 그걸 기꺼이 도와줄 사람이 다른 사람도 아니고 결혼한 사람이니까 가능할 것만 같았다.
"그래. 다 나으면."
확인 도장을 찍듯 말하는 패파는 확실히 기분이 좋아보였다. 그것에 덩달아 신이 난 호영은 더 하고 싶은 건 없냐고 물어보았다. 그을쎄. 길게 늘어지는 대답은 설렘도 초조함도 섞여있는 것 같아 옆에 있는 양피지를 옆에 끌어다놓았다. 부인께서 하고 싶은 거 다 적어보라고, 그렇게 내밀어진 양피지는 하얗게 비어있는 만큼 설레이기 충분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 결혼할 걸 그랬다.
패파는 야무지게 만년필을 쥐었고 호영은 그 옆에서 턱을 괴었다. 앞으로 무슨 일이 생길지 몰라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행복하다는 게 뭔지 확신할 수 있었다. 아주 오래도록 잊고 살았던 그 감각이 온 몸 구석구석으로 스미는 기분은 정말로 좋다고, 패파는 생각했다.

-EN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