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 자식이 미쳤나. 용병은 욕을 짓씹으며 생각했다. 눈을찌푸렸다 다시 떠봐도 잘못 봤나 싶어 눈을 비벼도 눈앞에 있는 건 자신이 죽이고자 했던, 죽이고 싶어 한 그 놈이 맞았다. 바로 하얀 마법사 그 남자 말이다.
"
제일 마지막에 남는 기억은 검을 들고 그를 향해 달려나간 일이다. 잊을래야 잊을 수가 없다고 용병은 목욕을 도와주는 여자들을 멍하니 바라봤다. 물 온도는 괜찮으신가요? 여인의 물음에 용병은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이 기억하는 삶은 피와, 먼지로 얼룩덜룩했는데 지금은 거품을띄풀어놓고 꽃잎까지 띄웠다. 너무 호화스러운 거 아니냐,
용병은 한숨을 쉬었지만 내심 기분은 좋았다. 돈을 벌기에 급급했던 이전의 삶은 이런 호사는 누리지도 못 했으니.
개운한 목욕을 마치고 옷을 입혀주는 걸 한사코 거절한 뒤, 시녀들을 물린 용병은 가운을 입고 의자에 앉아 지금까지 일어난 일들을 곰곰이 생각했다. 자신은 분명 그날, 죽은 게 맞았다. 지금 떠올려도 어제와 같이 생생한 기억과 고통, 두려움. 그녀에게 있어서 그날 있었던 마치 지옥과도 같았기에. 절대로 잊을 수가 없었다.
그렇다면 이건 꿈인가? 그것도 아니었다. 꿈이라고 한다면… 이런 생생한 감각은 감히 꿈이 흉내낼 수가 없다. 상대가 굉장한 마법사라면 또 다를 일이겠지만, 바로 떠오르는 얼굴을 애써 무시하고 용병은 거울 앞에 서 자신의 모습을 바라봤다.
이전의 삶과는 다르게 윤기가 흐르는 머리칼은 관리를 잘 받고 자랐다는 걸 보여주는 듯 했다. 그러고 보니 시종까지 있을 정도면 꽤 잘 사는 집인 것 같았지. 얼굴은 전생과 다름없었다. 다른 얼굴에서 오는 괴리감은 없으니 다행인가, 그녀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다 손을 내려다 본다. 생채기 하나없는 아름다운 손, 군살도 전혀 없고 매끈한 손에서는 방금 목욕을 해서인지 좋은 냄새까지 풍긴다. 평생을 검으로 먹고 살아온 사람에게는 조금 달갑지 않은 일이다.
"아가씨? 들어가도 될까요?"
"그래."
두어번 노크소리가 들리고 시종 하나가 들어왔다. 아까 목욕 시중을 들었던 아이다. 평소와 다른 분위기에 걱정이 된 것인지 얼굴에는 근심이 가득하다. 내가 전생의 기억이 떠올랐다고, 걱정을 끼치는 건 안되겠지. 눈매나 머리카락 같은 게 아린을 닮아 마음이 좀 써진다. 흠흠, 목을 가담은 용병이 그녀를 부르자 눈에 띄게 밝아진 얼굴로 그녀가 용병의 곁으로 달려온다.
"오늘은 평소보다 더! 아가씨를 아름답게 꾸며 드릴게요!"
"그래, 고마워."
"아가씨가 약혼하는 날인데요 당연하지요!"
약혼? 평생 들을 리 없으리라고 생각한 단어에 의아해지기를 한편 기왕 다시 태어났으니 누릴 거 다 누려도 괜찮지 않나, 라는 답지 않은 생각을 하며 용병은 몸을 맡겼다.
그래서는 안되는 일이었는데.
"
"오랜만입니다. 여전히 당신은 아름답군요."
오소소 단숨에 닭살이 돋았다. 눈앞에 있는 자신을 약혼자라고 지칭한 이 남자 때문에. 제정신인가? 당장이라도 욕을 퍼붓고 싶었지만 보는 눈이 많아 참는다. 이런 상황에는 무어라 말을 해야 되는지 잘 돌아가지 않는 머리를 애써 굴린다.
용병이 이렇게 된 것은 약혼자라고 자신을 지칭한 남자가 바로, 자신이 전생에서 죽이고자 한 하얀 마법사 그였기 때문이다.
다른 세계의 그일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녀와 마찬가지로 그가 환생하여 새로이 태어났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그건 그가 죽었다는 얘기라 입맛이 쓰다. 죽이려고 한 건 맞았지만 용병의 시도는 수포로 돌아갔으니, 그가 다른 사람에게 죽었다는 얘기가 되니까.
"어디 아픈 곳이라도 있습니까?"
"…현기증이 좀, 나서, 둘만 있을 수 있는 곳으로 가고 싶은데."
최대한 머리를 쥐어짜내 한 말이 이거라니, 용병은 이렇게나 자신이 바보라는 사실이 끔찍했지만 눈앞에 있는 그는 그녀를 걱정스러운 눈으로 바라봤다. 지금 걱정하는 건가? 이 남자가? 나를?
"부축해드리지요."
"그럴 필요는…"
"아닙니다. 아까부터 낯빛이 어두웠으니."
약혼녀를 걱정하는 건 약혼자로서 당연히 해야 될 도리 아니겠습니까. 저거 진짜 하얀 마법사 아냐? 말투가 밉상스러운 게 딱 그 놈 같은데. 애써 평온하게 그가 내민 손을 맞잡고 부축을 받아 도착한 곳은 에델바이스가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정원이었다. 이걸 이런 식으로 잔뜩 피워낼 수가 있었군 그래 신기한걸. 주위를 둘러보는 걸 뭐라 생각하고 있었는지 소리내어 웃은 그를 돌아봤다. 하얗고 긴 머리, 풍겨오는 신비스러운 분위기는 여전했지만 그녀를 향한 눈빛은 상냥했다. 그때는 안 이랬는데, 아니, 원래 이런 사람이었나?
"그녀가 그러더군요."
"뭐?"
"아가씨가 어디 아픈 것 같으니 제대로 보살펴주라고, 당신 걱정 하나는 알아줘야 될 수준입니다. 잘 지냈습니까? 낯빛이 확실히 좋은 건 아니라…"
"신경 쓸 거 없어."
얼굴로 뻗어 오는 손을 잡아 내린 용병은 멋쩍게 웃었다. 아까는 어쩌다 보니 손을 잡았지만, 역시 몸에 닿는 손길은 피하게 되는 모양이다. 그런 그녀를 유심히 바라보던 그는 웃었다.
아, 이제 와서인데. 나는 이 삶에도 이런 성격이었나? 퍼뜩 드는 생각에 고개를 쳐든 용병은 여전한 미소로 그녀를 바라보는 그를 보고 이내 생각을 고쳐 먹었다. 원래도 이랬으니 아무도 위화감을 못 느꼈겠지. 귀족 아가씨 치고는 괴팍한 성격이지만 그건 아무래도 좋았다.
"그럼 갈까요?"
"어디를?"
"그야 약혼식장 아니겠습니까. 당신과 저는 오늘 약혼하니까요."
"…아."
"설마 잊은 건 아니겠지요? 그렇다면 너무 슬플 것 같은데…"
"아니! 너도 알겠지만 내가 오늘 경황이 없어서, 잘 기억이 안 났다고 해야 될까."
"네, 압니다."
"너 지금 나 놀린 거냐?"
"그럴 리가요."
한결같은 대화, 하얀 마법사가 검은 마법사가 되기 전에 나눴던 대화를 떠올리게 했다. 이런 대화도 했었지 라며 추억에 잠기기를 한편 용병은 눈앞에 있는 그에게 미안해졌다. 자신만의 추억에 사로잡혀 그를 제대로 보고 있지 않은 것 같아서. 다시 태어나서 지금까지의 기억은 없지만, 눈앞에 있는 그라면 새로이 사랑할 수 있게 될 것만 같았다. 그래 이곳에서 모든 걸 잊고 새로 시작하는 거다. 용병은 그에게 손을 내밀며 작게 웃었다.
잠깐 움찔한 그였지만 이내 용병이 내미는 손을 잡고 웃었다. 그의 파란 눈이 검게 빛난다.
"
"아가씨가 결혼하신다니까 제가 다 기쁜 거 있죠?? 오늘 정말 예쁘세요!!"
"고마워."
제 일처럼 방방대며 기뻐하는 아이를 보자 웃음이 터져 나왔다. 마치 아린이 사랑을 많이 받고 자라, 어른이 된 모습을 보는 것만 같다.
"그래도 신기해요. 아가씨가 저런 남자랑 결혼할 거라고는 꿈에도 몰랐거든요. 그렇잖아요? 좀 뒤가 구려 보인다고 할까? 왠지 모르게 기분나쁜 느낌이고."
"사람을 겉모습으로만 판단하는 건 좋지 않아. 저번에도 말했지만… 그는 나쁜 사람이,"
거기까지 말한 내가 말을 멈추었다. '아린'이라면 했을 말이다. 저번에도라는 말은 말이 되지 않는다. 난 이곳에서의 기억이 없고, 지금의 내 이름조차 모르며, 눈앞에 있는 그녀는, 아린이 아니니까.
"들어가도 괜찮나요?"
"마음대로 해."
"앗, 정말 도움도 안되기는! 그럼 아가씨 이따 뵐게요!"
노크소리 몇번에 문이 열리고 들어온 남자는 하얀 마법사, 그였다. 하얀 머리카락, 파란 눈동자. 하얀 정장을 입은 그는 약혼식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머리부터 발끝까지 순백으로 가득했다. 물론 내 옷도 순백으로 가득한 드레스였지만. 그런 그를 뚫어져라 쳐다 보던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몇번이나 생각했지만 성격 참 나쁘군 그래. 나를 농락하는 게 즐거웠나?"
"생각보다는 오래 걸렸군요. 역시 영혼만을 사용하는 건 어렵나 봅니다."
"말 돌리지 마. 이게 다 뭐지? 나를 뭐라고 생각했는지 뻔해, 상냥한 웃음, 말, 깨끗한 옷들 환경 이런 것만 주면 기뻐할 줄 알았나? 기가 차서 할 말도 없군 그래."
"당신에게 거는 환각은 당신이 풀리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걸었습니다. 어떤가요? 당신이 저를 도왔다면 실현됐을 수도 있는 미래였을텐데요."
"집어 치워! 희생으로 얻은 미래따위 바라지 않는다고 했을텐데!"
단숨에 눈앞으로 다가온 그가 씁쓸하게 웃었다.
"저는 당신과의 미래만을 바라왔는데 아쉽군요. 창세를 선택한 저도 저입니다만, 당신도 고집 하나는 여전하네요. 이렇게 됐으니 한번 즐겨보는 건 어떻습니까?"
하지 못 했던 것은 전부, 제가 이루어 드리지요. 속삭이는 목소리는 유횩과도 같다. 티없이 맑은 하얀색으로 덕지덕지 칠해진 그가 상냥하게 웃는다. 양심과 그런 많은 것들의 제약으로 차마 살아있을 때 못 했던 선택들이 나를 유혹했다. 정말 이런 거 하나는 특기라고 해도 되겠어.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고, 그가 내민 손을 잡는다. 머리 위에서 축복이 펑, 소리를 내며 폭죽이 터지고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 내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