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름표의 은월 이름은 GMS 이름으로 표기했습니다
"아란! 괜찮은 건가요!?"
시끄러운 소리가 귓가에 윙윙거린다. 이게 무슨 일이람, 머리가 깨질 것만 같은 통증에 얼굴을 찌푸리면 연신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눈을 두어번 깜빡이고, 눈부시게 내려오는 빛을 마주하면 눈앞에는 나를 걱정스러운 얼굴로 쳐다 보는, 하늘빛 머리의 여자아이가 있다. …누구?
의아한 얼굴로 아이를 보자, 눈이 마주치고 안도의 한숨을 작게 내쉬던 아이의 표정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혹시… 아란, 제가 누구인지 알겠어요?"
"미안하지만 모르겠다."
이런 미친, 머릿속에 웅웅대는 것마냥 목소리가 들려 주위를 둘러봤지만 아무것도 없었다.
"이 도움 안되는 주인같으니…!"
"마하, 시끄러워요."
"
그러니까 아무 것도 기억 안 나는 것 맞죠? 그렇다니까. 또 기억을 잃었다니 이게 무슨 말도 안되는… 아, 미안해요. 당신이 더 혼란스러울 텐데. 그래서 제가 몇번이나 당부했는데도 당신은 듣지도 않고. …미안합니다?
나를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아이는 리린이라고 한다. 얘기를 들어 보면, 나를 보좌했던 사람인 모양이다. 나이도 어려 보이는데 장하구나. 응응 고개를 끄덕이자 리린이 한숨을 내쉰다. 차갑게 생겼는데 의외로 감정 표현이 풍부한 모양이로군. 의외야.
"당신은 기억이 안 나겠지만 아란은 세계를 구한 영웅이에요. 그리고… 옆에서 시끄럽게 떠드는 금발머리 남자는 마하라고, 당신의 정령이에요. 무기에 깃들어 있죠,"
"꽤 좋은 무기인 것 같은데 대장옹이 궁금한걸?"
그거는 또 알겠는 거예요? 나원참. 흥, 주인 눈은 여전하구나? 그런 걸로 기뻐하지 말아줄래요 시끄러워요. 뭐가 어쩌고 저째?!
다시 숨을 고른 리린은 마하의 투덜거림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내게 폭탄같은 말을 던졌다.
"아란 잘 들어요. 오늘은 당신의 결혼식이에요."
"신랑이 누구인지도 모르는데 결혼?"
리린은 나랑 그가 수행을 떠나겠다며 집에 머무르는 시간이 적기 때문에 결혼할 날을 잡기 어려웠다고 투덜대며 말했다. 이 날은 안돼, 저 날은 이래서 안돼, 말 같지도 않은 이유를 듣다 보니 짜증이 났는지 이 날로 하라며 쐐기를 박았고 그렇게 결혼하기로 결정된 날이 오늘. 그런 날, 얄궂게도 나는 기억을 잃었다.
신랑이 참 안됐어. 나는 기억을 잃어서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 하는데. 그런 나를 보고 리린이 넌지시 한 마디를 덧붙인다.
"저번에도 이렇게 기억을 잃었었으니까, 그 사람도 나름 익숙할 거예요."
"기억 잃는 게 익숙해지면 안되지 않나."
"어떻게 부케 던지는 연습을 하겠다고 폴암 휘두르다가 머리를 박고 기억을 잃나요, 많이 안 다친 게 다행이라지만."
다시 들어도 멍청한 이유로군. 잘 들어요 아란. 소동을 일으키는 게 싫으면 기억을 잃었다고 절대! 티내지 말아요. 그 사람 같으면 배려한답시고 날을 또 미루겠다고 할 거니까요. 알겠어. 아, 말투는 이랬나? 답지 않게 애교만 부리지 않음 될 것 같아요. 아, 알았다.
-
그렇게 그를 기다린 지가 벌써 몇분이 지났다. 손을 내려다 보니 장갑으로도 가릴 수 없는 잔상처가 많이 나있다. 답답하다고 벗어던졌는데 어떤 사람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사람이 뭐가 좋다고 결혼을 하겠다는 건지. 이해가 안되네, 기지개를 한번 쭉 피고는 무료하게 기다리다가 까무룩 잠이 들고 말았다.
"…일어났어?"
"? 아, 나도 모르게 잠들었나 보네."
인기척에 눈이 번쩍 떠지자 검은 머리를 길게 늘어뜨린 남자가 빙긋 웃었다. 그림에서 본 얼굴은 좀더, 싸늘해 보이는 인상이었는데 머리를 살짝 위로 넘긴 모습은 꽤, 아니 상당히 취향이다. 이 녀석이 나랑 결혼할 사람, 이라 이거지. 아 그러니까 이름은 분명히-
"은월?"
"응, 왜? 리린이랑 마하가 아란 네가 다쳤다길래 바로 달려왔는데 조금 늦었지, 미안. 상처는… 그리 깊지 않은 것 같네. 옛날부터 넌 튼튼했으니까."
큰일이다. 이런 애정이 듬뿍 담긴 시선을 받는 건 왠지 부끄럽다. 나도 모르게 머리에 대려는 손을 잡아 내려버리자 움찔한 '은월'은, 씁쓸하게 웃고는 이내 손을 갈무리했다. 그만, 내가 잘못한 것 같다고 이러면.
결혼…하기 싫어한다는 말은 들었어. 하긴 너라면 더 좋은 사람이랑 결혼할 수 있었을 테니까. 그래도 행복하게 해줄게. 딱히 싫은 건 아닌데. 그래?
눈에 띄게 환한 얼굴을 한 은월을 쳐다보는 건 어려웠다. 이내 고개를 젓고는 그에게 손을 내민다. 이런, 건, 했겠지? 은월은 동요없이 내 손을 맞잡았다. 다행히 이 정도는 한 모양이다.
"갈까?"
"그래."
'
그래, 은월은 당황스러웠다. 그도 그럴 게, 그 역시 아란에 대한 건 기억나지 않았으니까. 이곳에 오기 전에 어디를 크게 부딪힌 탓인지 어쨌는지 그는 제 결혼상대에 대한 건 기억하지 못 했다. 평소에 아꼈던 동생같은 아이 랑에게 은월은 아란을 은월이 아란을- 이라며 잔뜩 듣고 오지 않은 이상, 그는 아란의 얼굴도 무엇도 기억하지 못 했을 것이다.
마하가 알았다면 부부가 될 사람 둘이 사이좋게 기억상실이라니 꼴도 좋다며 코웃음쳤겠지만, 은월은 아란이 기억을 잃었을 거라고는 꿈에도 몰랐고 아란 역시 마찬가지였다.
평소대로 해! 밝히면 안되는 거야? 아란님, 전에 기억을 잃었던 적이 있어서 이번에는 은월이 기억을 잃었다고 하면 슬퍼할 거야. …그런가? 그런 거야! 은월은 여자 마음을 몰라도 너무 모르네!
평소대로 하라고 해도 어떻게 할지 감이 제대로 잡히지 않아서 그냥 몸이 움직이는 대로 자연스레 행동했다. 기억은 잃어도 몸은 기억하고 있다고 하지 않았었나, 은월은 물 흐르듯이 움직이는 입에 조금 당황했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아란, 자신과 부부가 될 사람. 모두의 영웅이라고 불리는 그녀는 흰 은발을 하나로 질끈 올려 묶은 모습에서 어쩐지 모를 투박함마저 느껴졌다. 그렇지만 그게 싫지 않았다. 까무잡잡한 피부는 군데군데 잔상처가 많았지만 그게 아름답다고, 그녀가 힘냈을 나날들이 절로 그려지곤 했다. 기억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손을 먼저 내밀어준 그녀가 아름다워 조금 멍하게 보던 은월은 퍼뜩 정신을 차리고 맞잡았다. 이게 바로 랑이 자주 말하는 콩깍지인 거겠지? 나도 정말 중증이야.
둘은 정말 여러모로 팔불출이 맞았다.
'
그럼 이따 보자. 그렇게 은월과 헤어진 뒤, 왠지 달아오른 뺨을 연신 문질렀다. 멀리서 저를 바라보는 리린의 시선이 느껴진다. 입모양이, 안 들켰죠? 고개를 끄덕이자 리린이 장해요 라고 말한다. 연하한테 장하다는 말을 듣는 건 좀 그런데. 어쨌든간에 용케 결혼식장에 도착한 나는 숨을 골랐다. 끝까지 안 들키면 돼. 암, 마음을 다잡자.
'
"쟤네 좀 이상하지 않아?"
"어떤 점이."
"아니 왜, 아란은 그렇다 치고 은월 저렇게 매사에 표현을 하는 녀석은 아니었을 텐데, 눈 좀 봐. 결혼한다는 게 기뻐요~ 라고 다 티내고 있네."
"오랜 짝사랑이었다니까 그럴 만도 하지."
짝사랑? 누가? 은월이? 그 달리 누가 있겠어? 아란이 워낙에 털털하니까 은월이 고생 꽤나 했을걸. 의외네. 이제 시끄러우니까 조용히 하고 식에 집중해! 네네 여왕님.
진부한 인사, 진부한 말. 당신은 그를 평생 사랑할 것을 맹세합니까? 고민없이 맹세한다고 한 나는 은월의 대답을 기다린다. 그도 고민없이 맹세한다고 대답했고 난, 기분이 좋았다. 무척이나.
"그럼 두분은 서로 맹세의 키스를, 하라고 하고 싶지만 아란님은 싫어하실 것 같으니… 넘어 가겠습니다. 다음으로는 아란님이 기다리셨던 부케 던지기! 던져주세요!"
진중한 태도로 주례를 보던 펭귄이 활기차게 소리를 높였다. 어떻게 참았대? 부케를 들고 자세를 잡은 나는, 크게 원을 그리며 움직인다. 이 바보가! 또 그러다가 어디 부딪히려고! 마하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애써 무시하고 있는 힘껏 부케를 던졌다. 그래, 있는 힘껏.
날아간 부케는 정확히 은월의 머리를 맞고 금발의 엘프 쪽으로 떨어졌고 그녀는 당혹스러워 하면서도 부케를 받아냈다. 그리고 난, 부케를 맞은 충격으로 땅에 고꾸라지는 은월을 향해 반사적으로 몸을 던졌고 그 순간 그와 내 머리가 쾅 소리를 내며 부딪혔다.
'
"영웅,님…?"
"아, 머리야… 뭐야? 나 왜 여기 있어? 부케 던지는 연습했던 것까지는 기억나는데. 얘는 또 왜 바닥에 누워 있나 몰라, 은월! 정신 차려!"
"으, 아란…? 웨딩드레스가 잘 어울리네."
그래, 네가 골랐잖아. 이 누님한테 잘 어울리지? 너도 머리 올린 거 어울려. 고마워.
"결혼식 도중이라고? 난 왜 기억이 없지?"
"또 기억 잃었던 거 아니야? 아란은 잘 잊으니까."
"내 탓은 아니었는데. 다시 결혼식 하면 안돼? 평생 있을 결혼식을 이렇게 끝내는 건 아깝잖아."
"우리한테는 이런 게 어울릴지도 모르지."
그렇네, 우리한테는 이런 게 어울려. 검은 머리 파뿌리 되도록~ 이란 말은 너는 몰라도 나한테 하면 안될 말이고, 평생 수련을 100만번 하더라도 같이, 어때? 너다운 말이네. 그렇지만 마음에 들어.
"아란."
"왜?"
"사랑해."
"나도!"

-EN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