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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종의 이유로 가문이 몰락했다는 사실은 계속 생각해보았지만 믿기지가 않았다. 자신의 부모는 물론 일가친척들까지 몰살하고 주변에있는 모든 것들을 화마(火魔)의 제물로 바쳐버린 그들은 이러한 행동을 한 이유를 부모가 반역을 저질렀으니 그 죗값을 치른 것 뿐이라고 했다. 반역? 그들이 그런 것을 할 성품이던가? 그는 목구멍까지 올라오는 말들을 꾸역꾸역 도로 삼켜내야만 했다. 혓바닥을 잘못 놀렸다간 자신도 어떻게될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장군은 비록 반역을 저질렀지만 네 아비가 쌓아온 공이 있기에 목숨만은 살려주는 것이라고, 오늘 일을 죽을때까지 기억하는게 좋을 것이라고 그에게 말했다. 기억하기 싫어도 기억하게 될 것 같은 상황이었다. 다친 왼쪽 눈에서 눈물인지 피인지 모를 것들이 흐르는 기분이었다.
신조차 용서할 수 없는 죄를 저지른 가문의 유일한 생존자이니 그는 일주일 후 북방으로 이송될 예정이었다. 국가에서 숭배하는 신이 눈길조차 주지않는다는 혹한의 땅. 아무런 대비없이 갔다가는 얼어죽을 것이다. 그들이 자비를 베풀어 그를 살려놓았다지만 자연은 냉혹하기 짝이없기에 죽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는 며칠동안 차라리 자신을 죽여놓았으면 하는 생각에 시달렸고 이송을 하루 앞둔 날 밤, 북방 지역을 다스리는 이에게서 짤막한 서신이 왔다고 했었다. 그 서신은 세간을 발칵 뒤집을 만한 내용이 적혀있었다. 며칠 뒤면 자신의 땅에 도착하는 남자를 자신에게 넘기라는 내용이었다. 어떤 것도 시키지말고 '흠집' 하나없이 넘겨야 할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아까전부터 왼쪽 눈을 보고 끼리끼리 모여 무언가를 열심히 얘기하더니 의사를 불러 최대한 빨리 다친 곳이 회복되도록 한 것이었나?
해가 뜨지도 않았는데 사람들은 그를 단장시켰다. 말끔한 옷을 입히고 다친 눈을 붕대로 감아놓았다. 흠집 없이 넘기라는 그녀(혹은 그)의 말을 어겼으니 어떻게든 그것을 감추려고 하는 것 같았다. 그는 사람들이 하는 얘기를 뜨문뜨문 들을 수가 있었는데 대부분 그를 넘기라고 한 북방 지역의 주인에 대한 이야기였다. 듣고싶지 않아도 들리게 되는 것은 어쩔수가 없었다.
북방 지역은 태양신 미트라가 눈길조차 주지않아 1년 365일중 320일은 늘 추웠고 날이 흐리기 때문에 농사를 할 수 없는 지역이 되어버렸고 다른 지역에서 식량같은 것들을 사들여야했으며 지금은 아니지만 한때 이단자들이 주둔하는 곳이 되어버렸었다. 이단자는 늘 문제를 일으키는 존재여서 그들을 국경 밖으로 쫓아내거나 죽이는 일을 해야했다. 상당히 혼란스러운 지역이어서 귀족들은 북방으로 가는 것을 꺼려했다. 지금은 이런 문제들이 대부분 해결되었다고 한다. 새로 부임한 대공이 상당히 험악하기 때문이라나 뭐라나.
사람들의 말에 따르면 대공은 난폭하고 사나운 존재라고 했다. 자신의 말을 듣지 않는 이들은 가차없이 죽였기 때문에 이단자들을 마치 청소하는 것마냥 죽여 문제가 말끔히 해결되었다고. 아주 사소한 실수여도 자비를 베풀지 않기 때문에 사용인들은 늘 긴장의 끈을 놓을 수가 없다고 했다. 그런 존재가 네놈을 원한다고 하니 네놈이 그 분을 어떻게 모셔야할지 예상이 가지 않냐고 기사는 그에게 물었다. 그렇게 버르장머리없게 나오는 것을 고치지 않으면 저잣거리에 목이 내걸릴거라나?
미리 알아두는 것이 좋을거라며 그(혹은 그녀)의 가문을 상징하는 문양이 그려진 종이를 받았다. 종이안에 그려져있는 문양을 본 순간, 그는 그동안 자신이 들은 이야기들의 대부분은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오는 이야기라 와전된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그 문양은 자신이 아는 이의 것이었으니까. 모를리가 있겠는가? 저 문장의 주인인 가문은 태양신에 대한 신앙심이 상당한 가문이었다. 가문 사람들 중에 신관이나 사제, 혹은 신전 기사가 된 이들이 제법 많았으며 다른 이들을 위해 베풀 줄을 알고, 신의 뜻을 알리는 가문 중 하나였기 때문에 그 가문의 이름을 모르는 이가 거의 없었다. 그러나 최근들어 가문 사람들 몇몇의 행방이 묘연해졌다나? 북방 지역으로 갔다는 말은 들은 적이 없었는데., 아니..생각해보니 그 집안의 고명딸이 가주가 되었는데 가주가 된지 얼마 되지 않아 자처하여 북방 지역으로 갔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는 고민했다. 말하고 걷는 것에 대해 알아야하는 나이때부터 10대 시절까지 친하게 지냈었으니 그녀의 성격과 행동이 어떠한지에 대해서 빠짐없이 알고있다. 분명 저런 험악한 내용에 대한 것들은 대부분 와전된 이야기일 것이 분명한데. 잘못된 내용이 많다고 굳이 말을 꺼낼것인가? 그러나 사람들이 서두르라며 그를 재촉하는 바람에 고민은 얼마 가지 않았다. 그들을 따라가며 잘못 말했다가는 그녀 또한 곤란해질지도 모르니까 북방 지역으로 가기 전까지 함구하는게 좋을 것 같다고,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이동하는 것은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알 수 없는 기술로 이동하는 시간을 단축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북쪽으로 향할 수록 점점 온도가 내려가고 주변의 배경이 달라지고 있었다. 북방 지역에서 자라는 말이 끄는 마차면 모를까 타지역에서 자라는 말이 끄는 마차로는 더 이상 들어가기가 힘든 지역이라고 하면 그들은 설원 한복판에다가 그를 내려놓고 가버렸다. 여기서 조금만 더 걸어가면 대공께서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 하면서.
얼마나 기다리고 있었을까, 어디선가 발소리가 들렸다. 사람 발소리는 아니었고 동물이 걸어다니는 소리였다. 알다시피 눈은 모든 소리를 집어삼킨다고 알려져있다. 그런데 어디서 이런 소리가 들리는 것인가.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누군가가 새벽빛을 떠올리게 하는 사슴을 타고 이쪽으로 오고있었다. 그녀의 가문만 기를 수 있다는 네로타를 이끌고 온 것일까, 이곳에 도착하길 기다리기라도 한 것인지 어깨와 머리 위, 그리고 검집 위에 눈이 쌓여있었다. 그것이 숨을 내쉬느라 그것의 몸이 살짝 오르락내리락 하지 않았더라면 그를 주시하고 있는 존재가 산사람이 아닐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거리가 가까워지자 그(혹은 그녀)는 한참동안이나 그를 내려다보다가 그것 위에서 내린 다음 그에게 다가갔다. 그는 자신을 불렀는데 눈이 소리를 삼킨 바람에 듣지를 못한 것일까 싶어하며 무슨 말을 해야할지 고민했으나 그런 고민은 얼마 가지 않았다.
저를 알아보시겠습니까.
아주 익숙한 목소리, 여자는 자신이 쓰고있던 투구를 벗었다. 자신이 오래전부터 기억하고 있던 그 얼굴, 북방의 추위와 혹독함이 어울리지 않는 모습 그대로였다. 그녀는 추운 곳에서 당신을 너무 오래 기다리게 했다며 그를 위아래로 훑어보다가 문득 그의 왼쪽 눈에 시선이 고정되었다. 흠집 하나 없이 보내라고 분명 서신에 그렇게 적어놓았는데, 어째서 그 쉬운 것조차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는 것이냐고 그녀는 그렇게 말했다. 공기가 차가우니 들어가서 마저 말을 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고 하며 그에게 겨울용 망토를 머리 끝까지 덮어주었다. 저택 내부는 주인을 닮아서인지 고요함만이 가라앉아있었다. 응접실이 아닌 자신의 집무실로 데려갔다. 응접실은 난롯불을 넣지 않은지 오래되어서 대화하기 힘들다나? 그녀의 집무실로 향하는 내내 사용인 빼고 다른 가족들을 마주치지 않았다. 듣자하니 부모님은 알 수 없는 이유로 죽었고 가문 사람들 또한 모조리 행방이 묘연해졌다는데 그것이 사실인 것 같았다. 이 넓은 저택에서 그동안 홀로 지내온 것인가? 그런 일을 겪고도 미치지 않은게 신기할정도였다.
이곳의 혹독한 추위에 익숙해져야한다, 그렇지 않으면 하루하루가 힘겨울 것이라며 차를 내온 그녀는 얼마동안 말이 없다가 이것을 어떻게 말해야할지 모르겠다고 하며 다시 입을 열었다. 부모님이 의문의 죽음을 맞이하고 어린 나이에 가주가 되고나서 가문을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만드느라 애를 먹었는데 사람들이 자신을 어떤 시선으로, 어떠한 기대를 갖고 보고있는지 너무나 잘 알고있어 그것과 최대한 거리를 두기위해 자의로 북방 지역으로 가겠노라고 왕실에다가 통보를 했다고 했다. 이단자로 인해 골머리를 앓던 왕실에서 너무나 기뻐하며(그럴 수밖에 없다. 신앙심 가득한 가문이 가서 이단자를 솎아내는 것만큼 좋은 일도 없으니까.) 배려를 해주지 않았더라면 자신은 어떻게 되었을지 상상이 가지 않는다는 말을 덧붙였다.
서론이 너무 길었다고 하면서 그를 이곳으로 부른 이유에 대해 그녀는 설명했다.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자신이 가주가 된지 얼마 안되었을때, 부모님의 방에서 일지를 발견했는데 자신이 태어난지 얼마 안되었을때 당신과 약속된 사이였다고, 그래서 부모님들끼리 자주 만남을 가졌던 것이라고, 부모님께서 이런 것에 대해서 알려주지 못하고 돌아가신 바람에 일지를 발견하기 전까진 전혀 모르고 있었다고 말했다. 당신을 찾기위해 몇 년동안 수소문을 했는데 이렇다 싶은 소식은 찾지 못하다가 반역죄로 가문이 몰락했다는 정보를 알게되어 당신을 이곳으로 데려오게 하려고 했다. 당신 집안이 그런 행동을 저질렀을 리 없다는 것은 이미 알고있다고 그녀는 말했다. 예상 외의 말을 들은 그는 당황했을지도 모르겠다.
신에게서 돌아서는 것은 물론, 반역을 저지른 가문과 약혼 중이었다는 것부터 왕실에서 의구심을 사고도 남을 일인데 혼인하는 것만큼 의심받을 일도 없지않은가? 재수없으면 한패로 몰릴지도 모르는 일이다. 하지만 그녀는 오래전에 내정되어있던 것을 무를 생각은 없다고 했다. 당신의 가문이 저질렀다는 일은 세상은 잊어버릴 것이라고, 누명을 뒤집어썼다는 것이 뒤늦게 밝혀지면 모를까 그게 아니라면 자연스레 잊혀질 것이라고......할 말을 모두 마치고 자신의 몫으로 내어진 차를 마시는 그녀가 어째서 삿되어보이는지 모르겠다. 차 안에 담긴 홍차가 오늘따라 피를 연상시키는 것 같았다
아, 그리고 수도에 퍼져있는 그녀에 대한 소문에 대해 사실인지 조심스레 묻자 이야기가 그렇게 와전되었냐며, 어쩌면 험악한 존재로 알려지는 것이 가문을 견제하는 이들이 줄어들면서 자신의 입지를 다지기 편할지도 모르겠다고 그녀는 말했다. 굳이 수도에다가 벽보를 붙이는 수고따윈 하지말라고 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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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식을 준비하는 기간은 길지 않았다. 조금 여유를 갖고 준비하려고 했으나 예상 외의 일이 그녀에게 닥쳤기때문에 그 일로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사용인 그 누구에게도 말한 적이 없었는데 자신의 영지는 물론 수도로 귀신같이 소문이 퍼져 가뜩이나 가십거리가 필요했던 귀족 가문들부터 시작해서 세상이 그녀에게 그 일이 사실인지 물어보기 시작했다. 그 질문에 대한 것은 침묵으로 일관하며 그들이 답을 기다리다 지쳐 나가떨어질 때 즈음 되서야 혼인을 하게 되었다는 소식을 세상에 알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