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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 눈의 시선

W.Pp지반

 

 

 

 

 

 

 

 

 

 

 

W. 고통, 망설임, 공황장애

 

T. 지속적 우울, 답답함, 식욕부진, 수면장애

 

F. 미련과 반성, 불안장애

 

S. 의욕저하, 부정적 사고

 

S. 지나친 죄책감, 집중력저하

 

 

 

W부터 S까지. 저번 주의 단조로운 일상은 새로움의 짜릿함을 원하는 파릇한 청년에게 있어선 다소 따분하고 지루하기까지 했다. 금방이라도 까부라져 맥이 빠질 것 같은 기분이 5일 동안 계속되다 보니 정말 미쳐버려도 아무렇지 않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혹은 이미 그러한 상황일지도 모르고 말이다.

살다 보면 옳은 선택을 할 때도 옳지 못한 선택을 할 때도 있다. 일을 끝마치고 난 후, 또는 일을 수행하던 중의 모든 감각이 이를 결정한다. 살갗으로부터 오소소소 전해지는 잔소름이 느껴진다면 상당한 체념을 안고 이미 저질러진 죄를 씻어내야만 한다.

할리는 그 날 처음으로 자신의 명석한 두뇌를 탓했다. 덕분에 평생 개처럼 일해도 갚을 수 없을 만큼의 현상금이 걸린 죄인이 풀렸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놈이 밤마다 같은 장소로 나를 불러내는 것도 예상치 못한 일이었으니 말이다.

처음엔 사실 그랬다. 나한테 고마움이라도 느끼는 건가? 싶은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 말이다. 그러나 본인을 가두어놓던 이가 할리의 상사인 점을 감안하면, 그것 또한 어이없는 생각이었다는 것이 된다. 게다가 녀석은 할리가 자신을 풀어준 행동이 실수 또는 실수 또는 실수라는 걸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의도적이지 않았다는 걸 말이다. 분명 CCTV 화면으로 의자에 묶인 저를 쳐다보고 관찰하고 흘겼던 인간 중 하나라는 것도 알테였다. 그렇다면 반대로 나를 죽이기 위해 불러내는 것인가? 본인이 신께 간택되어 얻은 최대한의 장점들을 살려 나부터 차차 죽이기로 마음먹은 것인가. 나를 스타트로 그다음은 상사를 그 다음은 더 높은 직위의 인간을, 그렇게 예전과도 같은 일을 되풀이할 생각인가. 그러나 이번에도 그리 알맞은 마침표는 아니었다. 만약 그러한 의도로 불러낸 것이었다면 할리는 진작에, 정확히 4일 전에 죽었어야 했으니 말이다.

 

"무슨 생각해?"

 

그는 정말 아무렇지 않게 입을 열었다. 나무 한 그루가 바람 빠진 풍선처럼 흐느꼈고 도망치고 싶다는 간절한 기도는 비웃음을 받으며 되돌아왔다. 아니, 사실 간절하진 않았다. 부탁과 간절의 중간 단계 그쯤으로 이 자리를 벗어나고 싶었다. 오늘 드디어 죽는 건가 라는 생각이 들 때마다 특히 그러하다.

 

"딱히 무슨 생각을 한 건 아니야"

"그래? 그치만 좀 더 긴장해도 좋을 것 같긴 해. 내가 어떻게 나올지 모르잖아."

 

그는 당돌하면서도 꽤나 뭉근했다. 반달처럼 내리깔린 눈꺼풀 아래로 진한 동공이 대번 날 위협했다. 절대 엉길 수도 얽힐 수도 없었으나 깊게 스며드는 건 언제나였다. 듬쑥하게 올라온 뺨의 홍조와는 자못 거리가 먼 분위기였으나 어쨌든.

밀착한 두 어깨가 맞두딪혔다. 그리 푹신하지 않은 시트 같기도 했고 호두가 물러 터진다면 꼭 이럴 것 같기도 했다. 물론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겠지만 말이다.

 

 

남의 마음 따위를 낌새 정도로 알아내는 것은 아주 불쾌한 일이었다. 때문에 잠시 흐트러지는 법은 있어도 온전히 생각을 빼앗기는 경우는 드물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반대는 많았지만 말이다. 장난기 가득한 천진난만한 시절부터 파열음을 몸에 달고 다니는 지금까지의 경력으로 만들어진 태도란 이리도 신랄하고 모진 법이었다. 의도적이지 않았지만 무심코 감정을 빼앗아버리는 일이 어느새 중독 되어버려 있었다. 나는 마음이 편치 못했고 늘 양해를 구해야 했지만 말이 그러하듯이 중독이란 쉽게 벗어날 수 없는 법이었고 또 그렇게 사는 게 되려 편하다는 것을 너무나도 빨리 알아버렸다.

그러나 너만은 그게 불가능했다. 대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가능한 선인지 찾을 수가 없었다. 너의 과거, 너의 기억, 너의 감정. 그 무엇도 쉽지가 않았다. 매일같이 바뀌는 낯빛은 내게 교란을 주었고 이는 추적 또한 불가능했다. 과할 정도로 많은 표정변화에서조차 찾을 수 없는 속내가 사람을 더 들끓게 하였다.

그렇기에, 내가 너의 생각을 분석할 수 없듯이, 너 역시 나를 눈치채지 못하길 바랐다. 네가 이곳에서 나를 기다린다는 걸 알면서도 그 누구에게도 너의 위치를 알리지 않았고 모른척했다. 하루하루 너를 찾기 위해 움직이는 수많은 사람 속에서, 같이 너를 찾으며 헤매고 있음에도 나는 알리지 못했다. 내가 씻어낼 수 없는 죄업을 아예 지워버리기로 마음먹었기 때문이란 걸 아무도 몰랐던 것이다. 국장도 메카닉도 그리고 너도. 너도 그랬으면 한다.

 

"..피터, 나랑 있을 때는 머리가 울리지 않아? 사실 그, 봤어 나도. 네가 메카닉이나 다른 연구진들이랑 있을 때 엄청나게 힘들어하던 거."

 

당연했다. 피터가 왔을 때부터 도망치는 그 순간까지 관찰했으니.

 

"옳은 일은 아니란 거 아는데…. 아니 사실 옳은 일이야. 미안하지만 거기서 네가 풀려났으면 더 많은 사상자가 나왔을 테니까. 나는 메카닉을 도울 수밖에 없어서 아저씨가 널 책임지는 순간부터 나도 같이 움직여야 했어. 그러니까 내 말은 나도 거기에 껴있었으니까 그래서,"

"할리"

"..응"

"네가 있을 때도 스파이디센서는 울려. 아주 심각하게. 근데, 왜 그런 거 있잖아. 기분 좋게 울리는 고통이라는 거."

 

 

 

“너랑 있으면 내가 그래”

 

 

 

 

 

 

 

**

 

"윽, 토할 것 같은데."

 

속이 메스꺼웠다. 딱히 먹은 것도 없는데 위장이 아려왔고 심장이 벌벌 떨렸다. 아이스크림이라도 먹을까 하다가 오늘도 지각이라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고 빈속으로 집을 나섰다. 차라리 토하는 게 더 나았을 것을.

신호를 기다리는 짧지만은 않던 그 시간에도 심장은 덜컥 내려앉았다가 솟아오르기를 반복했다. 심장병이라도 걸린 것 같았다. 몇 대 치면 괜찮아지려나 싶은데 길 한복판에서 미친 사람처럼 굴긴 싫어 참기로 했다. 사실 손을 심장 부근으로 올리던 순간 신호가 바뀌었기 때문이라는 변명도 가능하다. 이렇든 저렇든 좀처럼 해결되지 않을 문제라는 건 알고 있었다.

뉴욕의 거리는 로즈힐과는 분위기가 많이 다르단 게 아쉬웠다. 바쁘게 움직이는 수많은 사람은 모두 무감각했다. 놀랍도록 그러했다. 그들도 익숙해진 것이라는걸 느꼈다. 비슷한 부류의 기운을 출근길에서 알아차리는 것도 이젠 놀랍지만은 않은 일이다.

해는 떠올랐고 정확한 시간에 맞춰 지하철도 도착했다. 매일 걷던 길을 걷고 있으며 메카닉이 못 풀 거라며 놀려대던 그 공식도 오늘 아침에야 답을 찾아냈다. 지극히 일상적이고 평화롭기 그지없는 생활이었다. 다만 조금 비틀린 것은 오늘이 피터를 만나지 않은 채 3일째 되는 날이라는 것이다. 어제보다 조금 더 기울어진 것 외에는 바뀐 게 없다. 피터를 3일째 만나지 못했고 그건 나 스스로의 선택이었고 아마 내일쯤 되면 후회할 것이다. 지금도 약간 그런 비련의 주인공 같은 심리가 밀려들어 오고 있었다. 툭 건드리면 고꾸라지며 땅에 얼굴을 처박을 정도쯤이랄까. 뭐, 그랬다. 그거 빼곤 다를 게 없지. 음, 그렇고말고.

밤마다 피터를 만나는 것은 생각보단 흥미로운 동화였다. 동화, 딱 맞는 표현이었다. 피터는 내게 있어 조금은 과분한 상대였고 감당하기 벅찬 존재라는 것도 어느 정도 인정하는 부분이었다. 처음 녀석을 만난 그 날 밤은 다음 날 아침이 되어서야 꿈이 아니라는걸 자각했을 만큼 현실감이 없었다. 당시 나는 지나친 죄책감, 집중력저하로 인해 제정신이 아닌 상태였으며 누구한테 먼저 일을 알려야 할지 초 단위로 고민하고 있던 중이기도 했다. 역시 메카닉한테 먼저 알리는 게 맞겠지. 딱 그 사람이 떠올렸을 때 피터를 만난 것이다. 천진한 얼굴로 가로등 위에 쪼그려 앉아 나를 내려다보는 녀석을 말이다. 죽을 때까지 그때 그 기억은 잊히지 않을 만큼 강렬하고도 충격적일 것이다. 동시에 이렇게 죽는구나 싶은 생각이 가득하기도 했다. 왜 토니를 만난 뒤로 빌런들이 꼬이는 것인지. 아주 약간은 아저씨 탓도 있다고 느낀다.

그러나 일주일 정도 지났을 때쯤엔 모든 게 바뀌어있었다. 훈련받은 개가 된 기분이었다. 모든 게 자연스럽고 아주 당연하게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서 나를 기다리던 녀석도 그 밤공기의 흐름도 현재로썬 너무나도 그리운 것이란 말이었다. 단 며칠 만에 이렇게도 간절한 마음이 생길 수도 있다는 게 실로 놀라웠다. 시시콜콜한 일상이나 공유하며 시간을 보냈던 밤의 데이트가 이리도 나를 통째로 흔들리게 할 수 있었다니.

부정할 수는 없는 감정이었다. 지독하게 선명하고 분명했다. 피터를 만나는 날이 길어질수록 더욱 그랬다. 얼굴을 마주하고 그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홍조가 내려앉은 뺨이 증명하듯 너를 가리켰고 붉어진 손끝 또한 너를 가리켰다. 이런 나를 간보듯이 매일같이 기다리는 네가 진심이든 아니든, 난 이미 심장이 긁혀 되돌릴 수 없다는 걸 안다. 그렇기에 지금 이렇게 밀려오는 죄책감이 과연 너와의 만남을 토니한테 알리지 않아 나오는 감정인지 너를 가두고 관찰하며 괴롭혔던 지난 시간의 후회인지 알 수가 없다. 견딜 수 없는 죄악감에 시달리면서도 마지막 데이트를 떠올리며 그리워하는 자신이 한심했다. 쇠사슬에 걸려 이도 저도 할 수 없는 꼴이라니.

 

 

 

 

 

 

 

 

 

 

 

 

 

 

 

"누가 보면 네가 스파이더링인줄 알겠어"

"그럴 리가요"

 

할리가 어깨에 내려앉은 거미줄을 가볍게 툭툭 건들어 쳐냈다. 나뭇가지에 걸려있는 게 딸려온 모양이었다. 출근 시간에 맞춰 토니를 보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을뿐더러 집을 벗어난 이후 계속해서 피터만을 생각하던 할리에게 있어 토니의 스파이더링 발언은 꽤나 묵직했다. 혹시나 하는 생각이 불길처럼 퍼져나갔다.

애써 침착한 척 열심히 연기한 자신을 칭찬하며 책상에 앉을 때쯤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다니는 진동이 울렸다. 회사는 일이 있어도 분주하고 없어도 분주하다. 언제나 그랬고 오늘도 그럴 뿐이겠지 싶었다.

 

"꼬맹이, 그동안 너무 쉬게 해줬어. 밥값 해"

"당신이 준 공식도 증명하는 데 성공한 제가 밥값 하나 못할…."

 

고요하고 괴괴했다. 어중간한 망설임을 질색하는 청년은 본인을 훈계하며 한 걸음씩 발을 내디뎠다. 올곧게 자리를 지키던 동공초자 심하게 흔들렸다. 주변의 모든 소음이 희석되어 묽어졌다. 그 누구의 목소리도 들을 수 없었으며 침범할 수 없었다. 우연이란 바로 그런 것이다. 언젠가부터 입혀진 너의 색을 온전히 기억하기에, 우연이란 공식이 성립되는 것이고 그렇기에 이리도 진한 반동이 오는 것이다.

 

"피터.."

 

토니의 눈썹이 퉁명스레 위로 삐죽거렸다. 그래, 아마 그럴 것이다. 할리가 피터의 이름을 언급했으니 말이다. "언제부터 네가 스파이더링의 이름을 부를 만큼 애틋한 관계가 됐지?" 그는 엄중하지 못한 말투로도 꽤나 삼엄한 말들을 내뱉을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그러나 토니의 말 또한 할리에겐 들리지 않았다. 그는 지금 선혈의 선택권을 긁고 있는 중이 아닌가.

화면 속 피터는 언제 그랬냐는 듯 차분하고 조용한 상태였다. 축 처진 눈꼬리와 힘없이 말려 흘러내리는 꼬불머리, 크고 똥그란 눈을 반쯤 감은 나른한 표정, 도드라진 콧날과 자기주장이 강한 윤곽. 그리고 그럼에도 목표의식이 그득한 진한 눈동자. 이는 매일 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지난 3일을 제외한 근 한 달 동안 피터가 인사를 건네기 10초 전 할리가 늘 봐왔던 상황이었다. 피터는 먼저 자리를 지키며 할리를 기다렸고 그 기다림은 저 혼자 시간을 조종하는듯한 환각을 알리며 흘러갔다. 엄청난 체력소모를 가져오는 일이었다. 무의미하고 헛되이 사용되는 시간. 퉁명스런 애원이 오가는 시간. 먼저 입을 여는 이가 없었지만 둘은 같은 공간에서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음이 틀림없었다. '너무 늦은 거 아닐까' 라고 말이다. 모든 것이 말이다. 도망친 자나 도망을 도운 자나 같은 실루엣이 드러나고 있다는 것이 참 우습지도 않았다.

 

 

한 달 전과 지금을 비교해보자면, 정말 놀랍도록 달라진 것이 없었다. 할리에게있어 그간 있었던 일들은 모두 꿈 또는 조작된 환각이라 하여도 그게 진실이 될 만큼 무의미가 되어있었다. 제 발로 다시 기어들어 온 피터는 여전히 연구진들 사이에서 편두통을 느끼고 있었으며 그렇게 얻어낸 정보를 할리는 모두 곧이곧대로 기록해야만 했다. 차라리 없던 일이었다면 이리도 죄책감을 느껴진 않았을 터인데, 반경 10m 이내에 그 사실을 아는 이들이 어린 청년 둘 뿐이라는 게 문제라면 또 문제였던 것이다.

피터는 곧 정부에서 관리하는 연구센터로 이동될 것이다. 예전에도 그럴 계획이었으니 크게 달라진 것은 없다. 다만 그렇게 된다면 다시는 뉴욕 안에서 그를 볼 수 없다는 것이 추가될 뿐이다. 그리고 그렇게 된다면, 계속해서 문제를 일으킬 경우를 대비해 아마….

 

"죽겠죠?"

 

할리가 답지 않게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평소에는 신나게 입을 떠벌거리는것이 오늘따라 조용한 게 영 마음이 쓰였던 주변 인물들은 그 한마디에 미리 짜기라도 한 듯이 죽은 듯 눈알만 굴려댔다. 펜이 종이를 긁고 지나가는 사각 소리만이 귀를 맴돌았다.

'또 도망치도록 도와준다면…. 운이 좋다면 어쩌면 이번에도 가능할지 모르지…. 그땐 실수였는데 성공한 거니까 이번에는…. 온몸에 타박상을 입듯 한 소름이 두드러지게 척추를 타고 올라갔다. 맙소사,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제 머리를 쥐어짜 내며 얼굴을 구긴 할리가 이내 다시 CCTV 화면을 쳐다봤다. 여전히 침묵을 유지한 채 앉아있는 피터가 보였다. 어떻게 저렇게 침착할 수가 있지? 그는 놀랄 만큼 무덤덤해 보였다.

피터를 피한 이유가 바로 오늘과도 같은 상황이 올 때를 대비해서였다. 언젠가는 그를 잡아야 했고 능력을 사용하지 못하게 하기 위한 물질을 만들어내야 했으며 피터를 평범한 청년으로 바라봐서는 안되었기 때문에 미리 떠난 것이다. 토니를 포함한 모두를 배신했다는 스스로의 책망이 아예 없었다면 거짓말이었겠지만 가장 큰 부분은 역시, 피터가 사람을 해할 때 나라는 걸림 막으로 인해 그를 막지 못한다면, 그래서 결국 사람이 죽어버린다면, 그런 경우를 막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그런 다짐들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제 앞에 나타난 주의할 인물을 보자마자 해서는 안 되는 생각마저 해버린 자신을 어떻게 믿냔 말이다. 피터가 또 다른 상황에서 도와달라고 요청한다면, 나는 그를 내칠 수 있을까? 그가 고통받으며 끌려가는 모습을 그대로 보고 있을 수 있느냔 말이다. 만약, 나로 인해 자신의 위치가 들통나게 될 상황에 피터가 나를 죽이려 든다면…. 피할 수 있을까.

 

 

 

 

 

 

 

 

 

 

 

 

 

 

“화, 화면이 보이질 않습니다..”

"출구는 모두 봉쇄했기에 나가지는 못할,"

"G2가 뚫렸습니다!! 현재 용액에 의해 카메라에 닿은 부분이 녹아내리는 것 같습니다. 바로 보안 실에 연락을…."

 

CCTV 화면에 흰 막이 씌워지더니 한순간에 검은 칠로 뒤덮였다. 눈이 깜빡거리는 순간보다 더 재빠른 속도였다. 일각 모든 이들이 얼어붙은 듯 동작을 멈추었으며 입술을 떼어내는 것조차 힘겨울 만큼 예상치 못한 상황이었다. 스파이더맨에게서 분명 웹 슈터를 빼앗았을 터인데, 어디에 숨기고 있었는지 그는 갑작스레 자신을 내려다보는 CCTV로 용액을 발사했고 그 액들은 예전과는 다른 무언가 -색은 기존의 용액과 염산을 섞은듯하였으나 빠른 속도로 카메라가 녹아내리는 것을 보니 막의 형태로 거미줄 위에 덮은 액이 또 하나 있는듯하였다- 가 섞여 있었기에 피터가 갇혀있던 수감실의 CCTV는 무용지물이 되었으며 그곳을 기준으로 하나둘 화면이 꺼져가더니 이내 보안시스템이 퇴사선언을 하였다. 한 층의 모든 전기가 나가고 비상등이 켜지니 작동되는 시스템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지구에 존재하는 모든 이들이 한 번에 점프를 하면 이런 기분일까 싶었다. 목소리보다 다급한 발소리가 더 울리던 그 틈에 할리는 수감 실의 반대 방향으로 미친 듯이 뛰어갔다. 확신은 없었다. 그냥, 그러는게 맞는 것 같았기 때문에 그러했다.

붉어진 손등에 음산한 기운이 얹어졌다. 초점을 잃은 눈동자가 마구잡이로 길을 안내했다. 제발 제일 먼저 피터를 찾길 바랐다. 화면이 꺼지고 모두가 난장판인 그 상황에서 홀로 안도의 숨을 내쉰 저라는 존재가 혐오스러웠지만 일이 이렇게 된 거 피터를 찾는 게 우선이었다. 찾아서 사람들 앞으로 데려가든 말든 그건 그때 정할 일이라며 말이다.

단체 회의실을 지나갈 때쯤이었다. 그곳은 층의 맨 끝자락에 있었는데, 그 바로 옆 비상계단에서 뻗어져 나온 손이 자켓을 잡아끌었다. 아프지 않을 정도의 힘이었다.

 

"할리!"

 

숨을 고를 시간도 없이 고개를 치켜든 할리는 제 앞에 나타난 피터를 보자마자 제 품으로 와락 끌어안았다. 아, 아무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았다. 좀 더 평범하게 만났더라면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텐데. 너도 머리가 좋으니 스타크사의 인턴으로 같이 들어와 매일을 티격태격 거리며 지냈다면, 그랬다면 지금보다는 더 나았을 텐데. 네가 스파이더맨이 아니라 피터 파커로 내 앞에 나타났다면. 더, 좋았을 것을.

 

"할리. 할리, 들어봐. 우는 거 아니지?"

“…….”

"난 느낄 수 있다고 했잖아. 네 존재는 꽤나 기분 좋은 경고음이라니까"

"..피터, 그런 건 아무 도움도 안 돼. 대체 무슨 생각으로 다시 들어온 거야? 너 그렇게 대책 없이 구는 애였어? 지금 모든 출구가 봉쇄됐어. 이젠 나도 널 도울 수가…!"

"나는 도와달라고 한 적 없어. 예전에도. 지금도"

"네 말이 맞아. 근데 나…. 는,"

“...”

"ㅍ, 핏……?"

“뭐, 결국 크게 다르진 않네. 아프게 울리는 거나, 기분 좋게 울리는 거나. 똑같잖아.”

 

 

 

 

 

 

 

 

 

 

 

 

 

 

 

 

 

 

 

 

 

**

 

처음엔 아무 생각이 없었다. 그냥 죽여야 하는 세컨드 정도. 제일 먼저는 내게 손을 댄 약쟁이부터라고 다짐했으니까.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이상한 호기심이 생겼다. 다른 사람들은 스파이디 센서가 울려도 참 역겹게 울리는데 할리, 너만은 왜 지독하게도 기분 좋게 울리는 걸까. 처음으로 그런 생각을 했다. 센서가 혹시 경고음만 나타내는 건 아니지 않을까 하는 뭐 그런 걸 말이다. 다른 감정, 감각, 기분. 그에 따른 내 방향. 모든게 생소했고 나조차도 모르고 있던 나를 다시 찾아가는 기분이었다. 사람을 해할 때마다 느꼈던 건 짜릿함보다는 나를 지켰다는 안도감이었는데. 원래 그렇지 않나. 스파이디센서는 나를 지키라고 있는 것이니 말이다.

그렇기에 이런 생각이 들었다. 또 다른 감정이 생겨 센서가 다른 방향으로 울리는 거라면 그 또한 다른 방향으로 나를 지키라는 뜻이 아닐까. 그러니까 언젠가는 기회를 노려야만 했다. 어떻게 어떤 방식으로 어디서 널 해치면 되는지를 말이다. 매일 밤 너를 기다리며 수많은 생각을 반복하고 기회를 노리고. 어쩔때는 그냥 손만 뻗어서도 없애버릴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 바로 실현해버릴 뻔한 순간도 있었다. 애초에 너는 일반인이었으니 죽이는 것 정도는…. 아니, 사실 전혀 위협이 되지 않는 일반인이 내 센서를 자극한다는 사실만으로도 꽤나 흥미로운 일이었지.

하루의 반이 지나고 난 매일 같은 장소에서 할리를 기다렸다. 오늘은 할 수 있을까. 오늘은 네가 죽을까. 그러면서 기다리다 보면 어느새 주변이 어두워지고 센서가 울리기 시작해 곧 네가 나타났다. 한동안 같은 자리에 서서 나를 지켜만 보는 네가, 그 기분이 싫었다고 하면 거짓말이요 좋다고 하면 망설여지는 것이다. 이상하게도 망설여지는 것이다.

그러다 어느 날부터 나를 찾아오지 않았기에, 매일같이 울려대던 센서가 조용한 게 낯설고 어색했기에 이번엔 직접 찾아가 보기로 마음을 먹었다. 특별한 이유, 단지 미루다 미루다 기회를 놓쳤으니 오늘은 끝을 봐야지 싶은 마음뿐이었다. 그래서 일부러 잡히고 힘도 없는 이들에게 끌림 당하고 또 거지같은 카메라가 나를 지켜보고 역겨운 경고음이 초 단위로 편두통을 만들어냈지만, 그 사이에서도 기분 좋은 네 감각이 느껴졌기에 맞게 찾아왔구나 싶었다. 네가 이곳에 있으니 반은 성공한 것이다. 그러니 이제, 남은 반을 행할 때가 된 것이다.

 

 

 

 

 

 

 

 

검붉은 핏물이 손등을 타고 흘러내렸다. 손을 이리저리 뒤집으며 최대한 늦게 핏방울이 떨어지도록 시간을 벌이다 결국 고층빌딩의 아래로 톡 떨어져 나가자 피터가 고개를 뒤로 젖히며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쯤은 찾았으려나. 할리, 비상구에 있는데. 손가락 끝으로 전해져오는 그 생생한 감각이 아직도 온몸에 전율을 전한다. 마지막까지 나를 올려다보던, 그 푸른 눈만은 아름다웠던 아이. 밤마다 즐거운 데이트 상대가 되어줬던, 그 아이.

결국 다를 건 없었다는 결론이 나왔다. 센서가 뇌를 파먹듯이 울리든 기분 좋게 울리든 결국, 죽일 때는 같은 느낌으로 몸에 와 닿았다는 결론. 할리는 조금 다를 줄 알았던 건 단지 내 착각이었다는 것.

 

그러나,

 

왜,

 

내가 틀린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것인지.

 

 

 

 

 

 

 

오늘 밤은 뭘하며 보내야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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