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피터 파커와의 다섯 번째 약속한 첫 번째 데이트
w. 찬란
D-DAY
뉴욕의 7월 날씨는 그야말로 끝내줬다. 요 며칠간 내리던 가랑비도 언제 왔냐는 듯이 그치고 적당한 햇빛이 도심을 비추고 있었다. 이스트 강가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선선했고 여름 특유의 푸른 빛도 완벽했다. 오늘이야말로 모든 것이 완벽한 하루였고, 할리 키너는 오늘이야말로 반드시 성공하겠다며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물론, 오늘은 또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르고 한 행동일 가능성이 컸긴 하지만 말이다.
그냥 첫 번째 데이트도 아니고 왜 다섯 번째 약속한 첫 번째 데이트인지는 다 이유가 있다. 할리 키너 본인의 말로는 차마 눈물 없이 들을 수 없는 이야기라며 말하는 것을 꺼렸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특유의 컨셉질에 불과했다. 한 두어 번 쯤 물어보면 막힘없이 술술 나오는 것이 할리와 피터와의 이야기였다. 그런 특징을 잘 파악하고 있던 MJ는 '저 새X 또 지X 한다.' 라고 하며 자리를 뜨기 일수였다. 그래도 나름 피터의 베스트 프랜드이자, 할리의 연애를 도와주고 있던 네드는 할리의 이야기를 꽤 귀 기울이며 들었는데, 사건은 무려 한 달이나 전부터 시작되었다. 피터와 할리가 사귄 지는 50일이 다 됐으니까, 한 달 전이면 5월 말쯤 이었다. 할리 키너가 미드타운 과학기술고등학교에 전학 와서 구애 활동을 한 지 어느덧 세 달이 되던 때였다. 할리의 끈질긴 구애 활동에 지친 건지, 아니면 그 나름대로 할리가 좋아진 건지, 피터와 할리는 어느 순간부터 떨어질 생각을 안 하더니 결국에는 지금처럼 연애까지 하게 된 것이다. 문제는 할리 키너가 죽도록 좋아하는 대상이 스파이더맨에다가 학교 생활을 충실히 하는 나름의 모범생이며, 눈치가 더럽게도 없다는 점이었다. 사귄지 10일이 되는 날, 같이 영화를 보러 가자며 할리가 먼저 피터에게 데이트 신청을 했다. 솔직히 이제 사귀니까 같이 놀러 다니고 스킨십도 많이 해야겠다고 생각한 할리는 피터와의 데이트를 곱씹었지만 약속을 잡을 때 마다 죄다 망하는 것이었다. 처음으로 약속한 날에는, 갑작스러운 레포트 소식에 결국 할리와 피터 둘다 밤 늦게까지 레포트를 쓰다 잠들 수 밖에 없었다. 할리 키너는 '그래 이건 어쩔 수 없지. 다음을 노린다!' 라고 생각했지만 그 다음 약속도 파토가 났다. 이번에는 피터의 문제였다. 곤경에 처한 사람을 보면 지나칠 수 없는 정의 의식이 투철한 히어로 스파이더맨이 은행 강도 사건을 그냥 넘어갈 리가 없었다. 학교 끝나고 7시에 할리와 만나기로 한 약속은 뒤로 하고 은행 강도를 잡는데 힘을 다한 피터는 그 날 크게 다칠 뻔 했고 결국 데이트는 미뤄졌다. 그 때 할리는 데이트는 뒤로하고 애가 다치게 생겼다고 엄청 걱정했었다. 오죽하면 토니 스타크에게 찾아가 몸에 상처 하나도 안 나는 수트를 만들라고 협박 아닌 협박을 했을 정도였다. 그렇게 물 건너간 두번째 약속을 성공시키기 위해 세 번째 약속을 잡은 게 한 15일 전이었다. 이제 여름도 다가오니까 시원하게 바다에 가서 놀자고 한 약속도 결국에는 보기 좋게 망해버렸다. 하필이면 그 날 하루 종일 비가 와서 아무것도 못하게 된 것이다. 머쓱했던 피터는 할리에게 괜찮다며 그냥 집에서 영화나 보자고 했지만 누가 봐도 할리의 표정은 굳어있었다. 웬만하면 피터 앞에서는 싫은 티를 잘 내지 않는 할리도 그 때는 너무 속이 타서 자기도 모르게 표정이 굳어 있었던 것이다. 애써 괜찮은 척을 하며 먼저 집에 간 할리는 다음 데이트는 꼭 성공시킨다고 열정을 불태웠다. 그러나 코앞으로 다가온 기말고사를 까맣게 잊고 있었고, 네 번 째 약속도 결국에는 시험기간이라는 이유로 미뤄졌다. 그러니 할리 키너 입장에서는 미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대체 첫 번째 데이트를 몇 번이나 약속한 건지, 이제는 어이없다 못해 좀 무서워질 지경이니 말이다. 솔직히 말하면 그동안은 할리 자신의 잘못도 있었다. 일단 시기를 잘못 잡은 것과 날씨를 고려 안 한 것 까지. 피터의 히어로 활동은 생각하지는 못한 변수였지만 할리가 그 정도까지 고려하지 못할 인물은 아니었다. 그동안은 실패했지만, 할리 자신의 생각으로 오늘은 정말로 성공할 거 같았다. 날씨도 좋았고, 뉴욕은 요 며칠 간 계속된 순찰 때문에 나름 평화로운 상태였다. 그리고 이제 시험도 끝났고 진급을 앞두고 있으니 과제는 없을 것이 뻔했다. 그야말로 모든 변수를 고려한, 완벽한 데이트가 될 것이라고 할리는 생각했다.
약속 시간은 1시였다. 먼저 같이 점심을 먹고, ‘심심한데 영화나 보지 않을래?’ 라고 말한 뒤에 피터와 함께 미리 예매해 놓은 로맨스 영화를 볼 것이다. 그 다음에는 멋있는 레스토랑에서 저녁을 먹고, 물론 결제는 메카닉의 카드로 할 예정이니까 가격 따위는 신경 안 써도 됐다. 그 다음 집 앞에서 헤어질 때 50일 기념 첫 키스로 마지막을 장식하는 것이다. 할리는 저 머릿속에 있는 행복한 상상으로 준비할 때 마다 입 꼬리가 올라가는 걸 막을 수 없었다. 오늘이야말로 완벽한 날이 될 것이었으니까. 어느덧 시계가 12시 30분을 가리켰다. 오늘처럼 집 밖을 나가는 발걸음이 설렐 날이 있을까. 할리는 설레는 마음에 미리부터 지하철역도 달렸다. 오늘은 정말로 성공할 거 같았고, 예감도 좋았다.
“전화기가 꺼져 있어 삐 소리 후 음성 사서함으로...”
벌써 약속시간보다 20분이 지났는데도 피터는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평소에는 잘 되던 연락도 오늘따라 잘 되지도 않았다. 마지막으로 문자 한 게 어젯밤이었다. 보통 일어나면 ‘할리 잘 잤어?’ 라거나 ‘좋은 아침!’ 이런 식의 문자가 오기 마련인데 오늘은 아침부터 감감무소식이었다, 그래도 할리 나름으로는 피터가 가끔씩 이런 날이 있었으니까 그러려니 하고 생각했다. 그런데 전화를 세 번을 해도 받지를 않으니 이제는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데이트를 망쳤다.’ 라는 생각보다는 ‘설마 피터한테 뭔 일이 생긴 건 아니겠지.’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 만약 아침에 패트롤을 돌다가 뭔 일을 당해서 지난번처럼 연락이 안 되는 거라면 어떡하지? 그런데 그 때 이후에 토니 스타크가 수트에 온갖 기능을 다 넣어 놔서 생체 신호에 이상이 생기면 자동으로 업스테이트에 연락이 갔을 텐데. 위치 추적도 돼서 혹시라도, 그런 대범한 일을 하는 사람은 없을 거지만, 누가 피터를 납치했다고 해도 자동으로 아머가 날아올 게 뻔 했다. 매카닉에게 그런 연락이 없는 한, 패트롤 활동을 하다가 무슨 일이 생겼을 가능성은 적었다. 오늘은 7월 둘째 주 토요일이니까 메이는 일에 나갔을 게 뻔했다. 분명 집에 있을 텐데 왜 연락이 안 되는건지 의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물론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사이, 제 걸음은 자동으로 피터네 집으로 향했다. 무슨 일이 생겼을 거라는 걱정에 발걸음은 점점 빨라졌다. 설마 정말 패트롤 돌다가 다치기라도 한 거면... 안 좋은 생각은 계속 머릿속을 떠나지 않고 맴돌기만 했다. 빙빙 맴도는 생각이 길 앞에 서성거렸다.
“피터, 집에 있어? 문 좀 열어봐!”
10분만에 뛰어서 집 앞에 도착하자마자 문부터 두드렸다. 혹시라도 정말 집에 없다면, 나갈 데는 패트롤 밖에 없는데. 자꾸 안 좋은 생각이 들어 할리는 괜히 미간을 찌푸렸다. 피터, 나 할리야. 연락도 안 되고 걱정돼서 왔어. 집에 있는 거야? 초인종 소리에도 집 안에서는 반응도 없는 거 같았다. 역시, 밖에 나간건가. 다시 한 번 전화를 하자 벨소리가 희미하게 문 안쪽에서 들려왔다. 심하게 콜록거리는 기침 소리와 함께 말이다. 기침 소리가 잦아들자 콩콩 거리는 발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마침내 열린 문 앞에는 심하게 빨개진 얼굴의 피터 파커가 있었다.
“연락 못 받아서... 미안해...”
“야, 너 몸이 왜 이렇게 뜨거워? ...피터? 정신차려봐! ”
순식간이었다. 눈앞에서 그 작은 몸이 휘청이다가 이내 품속으로 쓰러졌다. 품속에서 내뱉는 열에 들뜬 숨결이 목 근처를 간지럽혔다. 깜짝 놀라서 껴안은 등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리는 것이 느껴졌다. 땀으로 범벅이 된 얼굴은 어딘가 불편하다는 듯이 찡그리고 있었다. 할리 키너는, 제 품에 안겨 있는 피터 파커의 상태를 보자 사고 회로가 멈추었다. 얘가 지금 내 앞에서 열 때문에 쓰러진건가. 이내 상황파악이 된 할리는 제 품에 안겨있는 그 작은 아이를 들어 올렸다. 불러도 대답이 없는 피터는 제 품 속에서 열에 들든 채 떨고 있었다. 급히 피터를 침대에 눕히자 이내 춥다고 웅얼거리면서 이불 속으로 파고들었다. 이불로 돌돌 싸맨 몸에서는 계속 식은땀이 나고 있었다. 애가 이렇게 아픈 걸 별로 본 적이 없던 할리는 어쩔 줄 모르다가 급하게 물수건으로 땀을 닦기 시작했다. 얘는 진짜 사람 걱정되게... 다섯 번째로 약속한 첫 번째 데이트를 결국에 성공 못시킨것도, 그 데이트가 미뤄진 것도 상관할 건 아니었다. 단지 지금 중요한 건 피터 뿐이었다.
“열이 쉽게 안 내리네.”
급한 데로 있던 감기약을 먹였지만 열은 쉽게 내리지 않았다. 벌써 한 시간 동안 물수건으로 몸을 닦아 주고 있었는데도 열이 쉽게 내리지 않았다. 아까보다 살짝은 내려갔지만 여전히 남아있는 열은 내려가지 않았다. 이마에서 느껴지는 뜨거움에 할리는 저도 모르게 얼굴을 찌푸렸다. 여전히 열에 취해있던 피터는 아까 보다는 좀 괜찮아졌지만 여전히 이불로 몸을 돌돌 감고 있었다. 옆에 앉아서 끊임없이 얼굴을 닦아주고 있는데도 식은땀은 여전했다. 몸에 차가운 수건이 닿아서 그런지 피터는 몸을 동그랗게 움츠렸다. 자면서도 추운 게 많이 느껴지는지 칭얼거리는 목소리가 계속 방 안을 맴돌았다. 아, 어떡하지. 순간 영화에서 보던 장면이 할리의 머릿속을 스쳤다. 아픈 사람을 안아주는 장면. 그렇게 몇 십분을 안고 있다 보면 새근새근해지는 숨소리와 함께 열이 내렸었는데. 할리는 이불 속에서 움츠려있던 피터를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품 안에 안긴 피터의 열기가 그대로 할리에게 전해졌다. 추운지 할리의 품속으로 더 파고들어 간다. 할리는 제 품 안에 폭 들어가는 피터를 보며 괜히 심장이 두근거렸다. 평소에 안고 있을 때는 안 그랬는데 오늘따라 심장이 더 빠르게 뛴다. 제 품 안에서 잠자고 있는 그 애가 오늘따라 더 강아지 같아 보여서 저도 모르게 웃음이 인다. 방 안에 온통 제 심장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 열에 들뜬 숨소리는 점차 잦아들었고, 제 품 안에는 살짝 미소 지으며 자고 있는 피터가 있었다. 거의 한 시간을 침대에 누워 있으니 할리 자신도 나른해지는 느낌이었다. 아, 나도 좀 잘까. 할리는 제 품 안에 있던 피터를 더 꽉 안은 채 잠을 청했다.
따뜻한 온기가 품 속을 파고들었다. 누군가 계속 자신을 잡는 느낌에 피터는 천천히 눈을 떴다. 흐린 시야 사이로 눈앞에 누군가가 보였다. 누구지? 아까 집에 누가 왔던 거 같은데. 팔 한 쪽을 빼 눈을 비비자 점차 그 사람의 형체가 선명해졌다. 갈색 곱슬머리에다가 감고 있는 눈, 회색 후드티.
“...할리?”
“...으응...이제 괜찮아...피터...”
잠을 자면서도 계속 자신을 신경 썼는지 이름을 부르자마자 잠결에 등을 토닥이며 자신을 더 꽉 안았다. 왜 할 리가 여기에 있지? 나 분명 오늘 할리랑 만나기로 했는데. 일이 어떻게 된 건지 생각하던 피터는 자신이 아파서 할리의 연락을 못 봤고, 할 리가 집에 찾아왔던 것 까지 기억해냈다. 아, 나 아파서 쓰러진건가. 진짜 오늘은 꼭 할리랑 데이트 하고 싶었는데. 계속 모든 걸 자신이 망친 거 같아서 마음이 저렸다. 어떻게 얘랑 밖에서 좀 놀려고 하면 뭔 일이 생기는 건지. 정작 할리는 제 속을 아는건지 모르는 건지 저를 계속 안고 자고 있었다. 말로는 매번 괜찮다고 하지만 실망했을 건 저 보다는 할리였을 텐데. 괜히 모든 게 짜증이 난다. 결국에는 오늘도 망쳐버렸다, 다 자신 때문에.
“...피터...울어?”
무언가 옷을 적시는 느낌에 할리는 천천히 눈을 떴다. 후드 티 소매가 살짝 젖어있었고, 제 앞에는 자신을 바라보는 피터가 보였다. 눈가가 촉촉해 진 제 애인은 자신의 목소리에 놀랐는지 고개를 들었다.
“아니! 하품해서 그런거야. 봐, 나 이제 괜찮아졌어.”
딱 봐도 뭔가 거짓말인 거 같은데 저는 아니란다. 그러면서 이제 몸 괜찮아졌다고 웃는 모습에는 왠지 모르게 슬픈 표정이 겹치는 거 같다. 오늘도 나 때문에 결국에는 망쳐 버렸네. 잠결에 누군가가 옆에서 했던 말이 귓가를 스쳤다. 성격은 더럽게 착해서 항상 모든 걸 자기 탓으로 돌리는 게 마음에 안 들었다. 아픈 건 아픈거고 중요한건 넌데 오늘도 넌 항상 네 탓을 한다. 바보같이.
“바보야. 너 때문 아니야. 왜 그래.”
“...어? 뭐가?”
“너 때문에 모든 걸 망친 거 같다며. 너 때문 아니야. 망친 건 더더욱 아니고.”
“뭐가 아니야...! 결국에는 오늘도 나 때문에 놀지도 못하고..”
할리는 제 앞에서 눈물을 글썽이는 애인을 자기 쪽으로 잡아 당겼다. 울지 마, 왜 울어. 축축한 눈가를 제 소매로 닦아버렸다. 어떻게 넌 우는 것 까지 예쁘냐, 기분 나쁘게. 피터는 자신을 따뜻하게 안아주는 할리에게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품속이 따뜻했다.
“그래도 데이트 못 한 건 많이 아쉽잖아.”
“지금 하면 되잖아? 데이트.”
“뭐? 어디서?”
“여기, 너네 집.”
뭐? 피터는 저를 안고 있던 할리에게서 황급히 벗어났다. 너, 설마 이상한 짓 하려는 거 아니지? 피터의 황당한 질문에 할리는 그만 웃어버리고 말았다. 내가 그런 짓 할 사람으로 보여? 우리 아직 고등학생이거든요, 피터 파커 씨. 얼굴이 빨개져서 주방으로 도망가는 모습이 화난 강아지 같아서 할리는 올라가는 입꼬리를 막을 수 없었다. 거창한 거 안 바라고 이런 것도 충분히 좋았다. 오히려 우리는 거창하게 무언가를 하는 것 보다는 이렇게 자연스러운 게 더 어울릴 지도 모르겠다.
“집에서 데이트를 어떻게 해, 그리고 너 우리 집 처음 오는 것도 아니잖아.”
“그건 보고서 쓰느라 온거지, 놀러 온 건 아니거든.”
“그, 그러면 뭐 할건데…?”
일단 배고프니까 저녁 먹고, 너네 집에서 영화 보고 놀면 되지. 어때, 완벽하지 않아? 할리는 선반 위에 있는 배달음식지를 꺼내 흔들어 보였다. 진짜, 못 말려.
“아직도 너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거 아니지?”
“...”
푹 숙이고 있던 고개가 갑자기 위로 젖혀졌다. 그리고 눈앞에는 회색의 타일이 아니라 할리의 얼굴이 보였다. 순식간에 눈 앞으로 다가온 할리는 피터의 양 볼을 살며시 잡고 천천히 제 입을 피터의 입에 맞췄다. 폭신한 느낌이 온 몸을 감도는 듯 했다.
“너 때문이라고 생각한 벌이야.”
“야 그런 게 어딨어...!”
갑자기 이러는 건 반칙이라며 황급히 제 입을 땐 피터는 빨개진 얼굴로 어쩔줄을 몰라 했다. 그런 피터가 귀여워서 할리는 한번 더 웃을 수 밖에 없었다. 아직 감기도 다 안 나았는데 걸리면 어떡하려고! 온갖 핑계를 대며 횡설수설하다가 할리와 눈이 마주치자 다시 고개를 숙이는 피터였다.
“그래서 싫었어?”
“...아니.”
“한 번 더 할까?”
대답 대신에 먼저 입을 맞추는 피터였다. 발개진 볼과 함께 꼭 감은 눈이 아직은 조금 떨린다는걸 보여줬다. 할리는 그걸 알았는지 적당하게, 너무 급하지 않게 입술 사이의 벌어진 틈으로 들어갔다. 다시 열이 오르는 거 같았지만, 아까와는 다른 기분에 피터는 웃을 수 밖에 없었다.
“야, 갑자기 왜 웃어…”
“이런 것도 좋은 거 같아서. 그냥 평범한 것도 말이야.”
그래, 거창한 건 필요 없었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라면 언제나 행복했으니까. 그게 비록 밖에서 하는 데이트는 아닐지라도 말이다. 피터는 영화관도, 바다도, 수영장도, 공원도, 그 어디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그냥 지금 이 순간 할리와 있는 게 행복할 뿐이었다.
“집에서 데이트 하는 것도 나쁘지 않지?”
“응. 일단 저녁부터 먹자. 내가 뭐 만들어줄까?”
“야. 아니, 그건 좀…”
“너 내가 하는 요리 맛 없어서 그런 거지.”
할리는 아니라고는 말 하면서 슬그머니 다시 피터의 방으로 향했다. 야, 할리 키너! 저를 붙잡으러 오는 소리에 황급히 문을 닫으려고 했지만 이내 잡히는 할리였다. 어차피 문 닫아도 한번에 열리거든! 자신의 요리 실력을 비하하지 말라며 씩씩거리던 피터는 오늘 제대로 요리를 해보겠다며 주방으로 나섰다. 잠깐만, 너 아직 감기 안 나았잖아! 할리는 주방으로 향하며 문득 생각했다. 그냥 이런 상황 자체가 좋다는 것을. 이렇게 평범하고, 아름다운 일상도 완벽했다는 것을 말이다. 지는 햇빛이 두 사람의 머리를 비췄다. 붉게 물든 석양과 함께 켜진 방 안의 불빛은 메이가 일을 마치고 돌아올 때까지 꺼지지 않았다. 물론, 두 사람의 웃음 소리도 말이다.

